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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침공 1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지 벌써 1년이다. 「아프가니스탄」동북부 산악지대에서는 「이슬람·게릴라」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고, 소련이 세운 「카르말」정권은 소련군의 보호아래 불안정한 연명을 하고있다.
소련은 수도「카불」과 주요 공로를 장악했을 뿐 「아프가니스탄」국민들의 반소 감정은 나날이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서방 세계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을 미국의 「베트남」전에 곧잘 비유한다.
소련이 「베트남」에서의 미국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깊이 빠져 진퇴양난의, 처지에 있다는 평가다.
사실 소련은 지난 1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침공의 대가를 적지 않게 지불했다.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은 소련에 대한 곡물과 기술수출을 금지하는 경제제재를 가했고, 지난여름「모스크바·올림픽」은 대대적인 「보이코트」로 초라한 골로 끝났다.
그밖에도 소련은 제3세계가 소련에 반발하고, 미·소「테탕트」분위기가 냉각되고, 미·일·중공 3국 협력체제가 강화되는 외교적인 대가까지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태를 가지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다고 보는 것, 「아프가니스탄」을 소란의 「베트남」으로 치부하는 것은 서방측의 희망적인 관측같이 보인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6개사의 병력을 투입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하나는 79년9월 「쿠데타」로 집권한 「타라키」정권의 소련이탈을 방지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하의 「이란」에서 미국 대사관 점거사태가 벌어지자 미국의「이란」보복에 대비하여 「페르시아」만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소련이 지불한 경제·문화·외교적 대가는 오히려 감수할 만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78년4월「쿠데타」로 집권한 「아민」대통령은 친소노선을 지켰다.
그러나 소련은「아민」정권의 민족주의적인 색채에 신경이 쓰였다.
1년 뒤 「아민」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타라키」에 대해서 소련은 더욱 심각한 소련이탈의 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소련은 79년 「크리스머스」때 동구에 망명 중이던 골수 친소분자인 「카르말」을 앞세우고 「아프가니스탄」에 무력 침공한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친「베트남」, 친소 「헹·사림」정권을 세운 것과 꼭 같은 방법이었다.
소련은 말하자면 「아프가니스탄」의 「캄보디아」화에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란」과 「페르시아」만 쪽의 사태도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서방세계, 특히 미국은 소련의 팽창정책이 「페르시아」만에서 서 태평양을 거쳐 극동에 이르는 원유수송로를 위협할 정도의 성과를 올렸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한다.
소련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나라가 아니다고 그들에게 「아프가니스탄」철수를 요구해 보아도 그건 마이동풍일 뿐이다.
미국은 「페르시아」만 수호를 다짐한 「카터·독트린」을 보완하여 신속 배치 군을 실전단계로 끌어올리는 조치를 서두르고, 「레이건」대통령 당선자의 인도양함대신설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방도가 강구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슬람·게릴라」들을 최대한 지원하여 소련이 이웃 약소국에 대한 무력간섭에는 적지 않은 출혈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도록 하는 것이 제2, 제3의 「아프가니스탄」사태를 방지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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