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기 일 기원 선수권전 도전 제4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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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하고있던「사까따」(판전영남) 9단이었다. 마치 나는 지상에 있는 사람이고「사까따」9단은 구름위에 있는 사람인 것같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사까따」9단에게 2연승을 거두었으니… 나는 그만 교만해지고 말았다.
『자, 이제는 새판 중 한판만 이기면 선수권자가 된다』두판을 연달아 이겼으니 남은 세판 중 한판을 못이기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신문 기자들도 한사람 한사람 찾아와『아니,「사까따」9단도 치훈이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데. 선수권자가 되겠군』하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당시 18세였던 나는『예, 예』하며 그렇게 될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나는 졌다. 2패로 막판에 쫓기던「사까따」9단이 무서운 집념으로 나를 눌러 3연승, 3승2패로 선수권을 방어해 버렸다.
이번에 소개하는 5번 승부 중 제4국은 천추의 한을 남긴 한판이었다. 이 바둑은 내가 99%이긴 바둑이었다. 백을 쥐고 두어 백1백68이 되었을 때 나는 6∼7집을 이기고 있었다. 끝내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 어떻게 될 수도 없는 국면이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대국장 주변에서는「조치훈 선수권자 탄생」이라는 결론이 내려져 웅성거리면서 임해봉 9단,「오오히라」9단 등은 환성을 올렸고 주최 신문 특은 한국 특파원들에게 나에 대해이것 저것 물어 취재를 마쳐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1백74를 두었다.
백1백74. 이점은 정말「프로」기사는 물론이고 바둑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도저히 둘 수 없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놓을 필요가 없었던 이 한점.
흑1백73이 두어졌을 대 마치 마술사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이끌려 들어 따라둔 이 한점으로 바둑은 완전 역전되었다. 나는 완전히 실의에 빠져 1백81수를 보고 돌을 던졌다.
「기따니」문하의 대 선배인「오오히라」9단은 TV중계를 보며 해설하다 이 수를 보자 『앗』하고 소리치며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다. 흑 1백81로 바둑이 끝난 다음에도 흥분한 임해봉 9단은 대국장에 뛰어와 가운데 2점을 잘라먹어도 미세한 바둑인데 포기한 것은 빠르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재연형은 바둑이 끝난 후 이같은 관전기를 쓰며 울먹였다고 들었다.
그날 밤 나는「신쮸꾸」(신숙) 거리를 헤맸다. 술을 꽤 마신 모양이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축 처진 몸으로 북해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지금 나의 아내인「교오꼬」가 있는 북해도로 가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깝게 놓친 제4국 때문에 제5국은 잘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다.
제5국을 진 것에 대해 지금 나는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얼마 전에 있은「오오따께」와의 명인전 제4국에서 팻감을 쓰지 않고 패를 따 무승부가 되었을 때 나는 문득 이 바둑이 생각났었다. 명인전 제4국도 완전히 이겨있었던 것을 무승부로 놓친 것이다.『그 때처럼 좌절해서는 안 된다』-이것이 무승부의 판결이 내려질 때 나의 뇌리에와 박히는 생각이었다.
그런「해프닝」이 있었지만「오오따께」를 연달아 눌러 명인이 되었다. 명인전을 이렇게 끝낼 수 있은 것은 어쩌면 이「사까따」와의 대결에서 얻은 뼈아픈 체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따니」선생은 나에게 끈기가 없는 것이 가장 약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끈기있는 기사」란 말을 듣고있다. 「사까따」9단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 바둑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처음 나는 네 귀에서 살아 실리를 키웠다. 그러나「사까따」의 세력이 커 불리했다. 백42부터 84까지로 추격했다.
흑99가 과수로 한줄 아래 두든지 100의 자리에 놓았으면 좋았다.
「사까따」9단의 흑1백11이 무리수. 이를 이용해 우상귀 흑을 공격해「찬스」를 잡았다. 백1백44·1백46으로 되어서는 내가 완전히 유리했다. 백1백68로 중상 흑3점을 끊을 수 있게 되어서는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흑1백73. 그냥 둬본 것에 지나지 않는 이수에 나는 덜컹 1백74로 받아버렸다. 1백81의 자리에 놓았으면 끝나버렸을 것을….<계속><정리=김두겸 동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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