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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3)제71화 경기 80년(1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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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합방 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 관리가 대거 현직에서 물러났는데 같은 현상은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교육의 발효와 함께 일본인 교사가 대거 진출했음은 물론 관립영성고등학교의 마지막 교장이던 홍석현이 물러나고 일본인 「오까·모도스께」(강원보)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1900년10월3일 열강의 침략을 막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자는 선각자들의 몸부림 속에 근대적 최고교육기관으로 출발했던 「경기」는 이때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인 교장의 연출시대를 맞게된다.
관립한성고등학교 시대의 역대교장은 김각현 (초대) 이필균(2대) 민영오 (3대) 이달용(4대)이원용 (5대) 홍석현 (6대)으로 이어졌었다.
총독부 학무당국은 경성고보의 교장인선에 고생했던 것 같다. 경기는 명실공히 한국인을 위한 대표적 교육기관인 만큼 어떻든 유능한 인물을 교장으로 내세워야했기 때문이다.
초대 교장이 된「오까」는 1865년 출생해「홋까이도」(북해도)의「삿뽀로」(찰황) 농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다.
「삿뽀로」농학교는 「북해도」 제국대학의 전신으로 『소년이여! 대망을 품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미국인 「월리엄·S·클라크」박사가 초대교장으로 재직한 학교였다. 「클라크」교장의 감화를 받아 이학교 출신자 가운데서는 「우찌무라·간조」(내촌감삼)·「니도베하나조」(신도호도조)같은, 현대 일본의 유명한 사상가 교육가가 나왔던 것이다.
「오까」교장은 한국에 오기 전 일본국내에서 여러 중학교의 교장을 역임했고 경성고보 교장에임명될 당시는 「가고시마」 (녹아도) 현립 제1중학교장으로 있었다. 「오까」는 1920년6월23일 문관분한령으로 휴직할 때까지 8년6개월 동안 재직, 역대교장 가운데 최장의 교장이었다. 「오까」교장이 취임했을 당시 필자는 졸업을 앞둔 4학년이었다. 취임식날 작달막한 키에 콧수염을 기른 「오까」 교장이 연단에서 취임 훈시를 마친 후 갑자기「오와리」!(끝이라는 뜻)하는 바람에 배꼽을 뽑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군대식일본용어는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총독부시대의 초대교장으로 본교교육의 기초를 굳게 한 교육자다.
조선교육령 실시와 함께 일본인 교사가 대거 진출했음은 앞에서도 지적한바 있다. 1911년11월부터 1920년말까지 약2년동안 취임한 한국인과 일본인 교원수를 보면 한국인은 모두 13명인데 비해 일본인은 76명에 달했다.
새로이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정된 1911년 11월1일자로 6명의 교유 (당시 교사의 직명)가 취임했다.
그들은 관립중학교의 제2회 졸업생인 허섭(1913년6월4일까지 재직)을 비롯, 일본인 「오구라」 (소창진간)·「우에다」(상전준일낭)·「사까노우에」(판상강길)·「다까기」(고목선인)·「와따나베」(도변춘장) 등 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오구라」 「우에다」 같은 교유는 극히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오구라」는 1906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명치대학 강사를 거쳐 1911년 한국어 연구를 위해 한국에 왔던 것이다. 그는 총독부에서 편수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경성고보에서 5년6개월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후 경성의전교수·총독부편수관. 1926년 경성제국대학교수에 취임했다.
그동안 그는 신라시대의 향가 및 이두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얻었고, 또 일본학사원 은사상을 받았다.
「우에다」는 1900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에 건너와 대한제국 학부의 편수관으로 있다가 우리학교에 부임했다. 만5년동안 재직한 후 그는 총독부 현학관이 되었고 1923년「오오사까」 (대판) 외국어학교의 교수. 1930년 여자학습원교수가 되었다.
이는 일본인 교사들 가운데서도 그 당시 졸업생들에게 묘한 감화를 주었던 인물로 단연 「고이데」 (소출)를 들 수 있다.
동경고등사범에서 음악을 전공한 그는 우리학교에서는 음악과 지리·역사를 겸해서 가르쳤다.
그는 수업도중 틈만 있으면 배일사상을 불어넣어 주었다.『너희는 한국인이고 너의 나라가 따로 있다』는 얘기였다.
특히 음악시간에는 본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가끔 조선『애국가』를 손풍금으로 들려주는 것이었다.
지금 들어도 구슬픈 당시『애국가』의 곡조(「스크틀랜드」민요 「올드·랭·사인」의 곡조)가 손풍금의 선율을 타고 퍼지면 학생들은 묘한 감회에 젖곤 했다.
「고이테」는 일본에서 건너 올 때 어린 딸 하나만을 데리고와 독신생활을 했는데 학생들간에는 그의 아버지가 천황을 시해하려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이데」는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에 회의를 느껴온 양식있는 지식인이었던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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