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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승자 없는 전쟁, 가자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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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한 달 가까이 이어지던 3차 가자 사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로부터 지상군을 철수하고 하마스 역시 로켓 발사를 자제하는 등 그 끝이 보이는가 했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 중재로 마련된 72시간 잠정휴전이 끝나면서 다시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동시에 국제사회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마스 전력 상당 부분을 와해시켰고 가자와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하마스의 비밀 땅굴 32개를 색출해 파괴했다. 게다가 아이언돔이라는 비장의 무기로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스라엘 국민의 86%가 이번 침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내부 응집력을 한껏 과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이야기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으로 가자 지역에서만 팔레스타인 사망자 1848명, 부상자 9000여 명이 발생했다. 그 가운데 80% 이상이 민간인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8월 4일 유니세프에 따르면 어린이 사망자는 408명으로 전체 민간인 사망자의 31%에 해당한다. 모스크, 병원, 시장, 이슬람 대학, 어린이 놀이터, 심지어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시설에 대해서도 무차별 타격을 가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 참혹한 현상에 국제사회의 공분은 증폭되고 있다. 평소 말을 아끼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까지 이스라엘의 행위를 “도덕적 폭거이자 범죄”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슬람권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반(反)유대 정서가 고조되고 독일에서는 아예 ‘이스라엘-나치 살인자’라는 금기의 슬로건마저 나돈다. 곳곳에서 이스라엘 제품을 보이콧하겠다는 움직임도 보인다. 전쟁에서의 승리 이면에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가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쓰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세계의 이목은 냉정하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 연구소의 6월 여론조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이란, 북한 다음으로 부정적인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중동 지역 유일의 민주국가, ‘자유·정의·평화’라는 메시아적 가치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라는 이미지는 일거에 사라져버렸다. 그런 모범국가가 가자지구를 ‘창살 없는 감옥’으로 불리는 내부 식민지로 만들어 통제하고,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양민을 대량살상했다는 사실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인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 역시 승자가 아닌 패자일 뿐이다.

 하마스도 승리를 주장한다. ‘하마스 타도와 섬멸’이라는 이스라엘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이란, 시리아, 이집트, 기타 아랍 국가들로부터 지원이 끊기면서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했던 하마스에 이번 침공이 반전의 계기가 됐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생존의 모멘텀을 다시 찾은 셈이다. 그러나 그 비용이 너무 크다. 하마스는 비록 무장 테러조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100만이 넘는 가자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책임지는 공식적인 정치·행정 조직이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봉쇄를 외교적으로 풀고 가자 주민들의 삶을 향상시켜야 하는 책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민을 볼모로 잡은 것 아니냐는 의구심 앞에서 하마스 역시 패자일 수밖에 없다.

 미국도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양측의 평화협상을 주도할 수 있었던 미국의 가장 큰 자산은 ‘공정’이라는 위상이었다. 이 위상이 사라질 때 미국에 대한 신뢰와 존경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민간인 살상을 공개적으로 규탄하면서도 같은 날 이스라엘에 아이언돔 구매예산 2억25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미 의회 역시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 규정, 규탄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랍, 이슬람권이 미국을 불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 때문이다. 하마스의 와해를 내심 환영하며 가자 사태에 방관적 자세를 취했던 아랍 국가들 또한 패자의 대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도무지 ‘영(令)’이 서지 않았던 유엔도 마찬가지다.

 승자 없는 이 지긋지긋한 전쟁, 어떻게 끝내야 하나. 우선 이스라엘은 가자 봉쇄를 해제하고 하마스를 정치적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오슬로협약의 ‘두 개의 국가’라는 해결책에 전향적으로 임해야 옳다. 하마스도 경직된 원리주의의 덫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가자 주민들의 안전과 민생을 챙겨야 한다. 그러려면 무장투쟁 노선을 버리고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하나가 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 ‘두 개의 국가’ 방안이 성사되기 어렵다면 코소보처럼 가자 지역을 유엔 관할하에 잠정적으로 두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화에 희생된 숱한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평화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