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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한 사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소련수상 「코시긴」이 사임했다. 「브레즈네프」의 그늘에서 언제나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안악한 사임」이란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소련 권력사를 보면 으례 사임하는 정치지도자는 피묻은 발자국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사임, 그 자체가 유혈의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이래 소련도 점차 평화적인 지도자 교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수상이 하루아침에 지방관서의 말직으로 곤두박질하는 「드라머」는 사라진 것이다. 더구나 관청에 의해 처형되는 일도 좀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역시 소련도 산업사회를 지향하면서 정치의 행태·권력구조 등이 「모더나이즈」(현대화) 되고 있는 것 같다. 세련되어 간다고 나 할지.
산업사회의 속성이랄까, 강점은 합리성의 추구다. 독선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소련도 점차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며 무리나 공연한 긴장이나 공포정치로는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코시긴」의 뒤에는 벌써 1965년부터 부각설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었다. 한때는 말단직으로 좌천될 것이라는 풍설도 서방 신문에 심심치않게 나돌았다. 이른바 「브레즈네프」 「그룹」의 「아파라치키」와 「코시긴」「그룹」의 「테크너크래트」와의 암투설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10여년 가까이 실각설을 견디어낸 것을 보면 소련도 그 나름으로 권력의 「밸런스」유지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새로 수상에 임명된 「티호노프」는 「브레즈네프」인맥의 한 줄기다. 교육도 별로 받지 못한 기관차 화부 출신으로 그는 반세기 가까이 「브레즈네프」의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코시긴」의 사임은 새삼 「브레즈네프」의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소련의 정치 지도자는 흔히 행정의 총수인 수상이 전면에 나섰지만 「브레즈네프」는 그런 관례를 덛고 일어서서 삼두체제의 「룰」을 벗어나 「원·맨·쇼」로 일관했다.
「코시긴」의 온화한 인상으로 보아 필경 충돌이나 도전 아닌 화합의 「룰」을 따랐던 것 같다.
「코시긴」이 「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시대를 통해만 한번도 숙청되지 않고 소련 권력층 내부에서 가장 오랜 정치 생명을 누린 것도 그런 성품이 작용했음직하다. 「흐루시초프」는 「코시긴」이 「레닌그라드」의 유혈숙청 시대를 견디어낸 비결을『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고 함축 있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도 이젠 낡은 정치수법으로 새로운 세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무엇보다 흥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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