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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르시아』만을 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77년이 저물어같 무렵의 「테헤란」. 출처불명의 괴문서 하나가 왕실담당상「아미르·호베이다」의 손에 들어갔다.
국왕 「팔레비」 가 직접 쓴것 같기도하고 「팔레비」의 지시를 받은 어떤 고위관리가 쓴것 같기도 했다.

<5천신도 기관총세례>
내용은 그로부터 15년전「호메이니」가 공산주회자들과 지주들의 사주를 받아 토지개혁과 여성회정권인정을 포함한 「팔레비」의 백색혁명에 반대하는 폭동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 「호메이니」는 전국적인 반 「팔레비」 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이라크」로 추방되었다.
문제의 문서는 공보상의 손을 거쳐 일간지 「에텔라트」 의 편집자에게 전해졌다.
78년1윌7일 「에탤라트」 지는 그 문서의내용을 대서특화로 보도했다. 「에탤라트」지의 편짐자들은 그들의 특종비화가 2천5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회교제국의 종말을 재촉하고 자유세계 석유공급의 40%를 담당하는 「폐르시아」를「풍요의 바다」 에서 「불안의 바다」 로 바꾸어 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날 「에텔라트」지의 보도가 「호메이니」가가 있는 성도 「콤」 에 전해지자 5천명의 열성신도을이 「파티마」 사원에 모여 항로집회를 열고 밖으로 나오다가 밖에서기다리는 경찰의 기관총세례를 받았다.
수많은 신도들이 현장에서 쓰러졌다. 경찰은 부상자들에 대한 수혈까지 저지하여 병원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했다. 「콤」 의 최고 성직자인 「가셉· 샤리아트마·다리」 는 『전능하신 「알라」가 책임자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 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반 「팔레비」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폭동으로 변했다.
「팔레비」 는 악명높온 비밀 경찰「사바크」의 최고책임자 해임. 계회령선포, 정치범석방같은 조치를 잇달아 취했지만 기울어가는 「팥레비」 왕조의 운명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팔레비」는「파리」에 망명중인「호메이니」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호메이니」는 그것을 일축하고 「카세트·테이프」와 국제전화로 총파업을 포함한 반「팔레비」 폭동을 지휘했다.
「이란」 의 석유생산량은 하루6백만 「배럴」 에서 최하 60만 「배럴」로까지 떨어져 경제파탄의 위협이 또한 「팔레비」 의 운명을 재촉했다.
「에탤라트」지의 보드로부터 만 1년이되는 79번1윌16일, 「팔레비」는「이란」의 흙 한줌을「코드」주머니에 넣고 국왕전요기「보잉」707을 직접 조종하고 불로의 망명길을 떠났다.
「시아」 파 「이슬람」의 「바티칸」. 반 「팔레비」운동의 당원지, 「이슬람」의 승려 를 양성하는 유명한 「매이지에」종교학교가 있는 성지「콤」은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l백80km떨어진 인구25만명의 도시다.

<『페르시아시장』을 연상>
영양실조에 걸린 소나무와「아카시아」가 가로수의 대종을 이루고 나직한 벽돌 건물들이 먼지와 소음투성이의 거리에 늘어선 「콤」은. 중동최강의 군사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미국의「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팔레비」 왕조의 붕괴를 선사한 정치도시. 말하자면 제정 「러시아」 의「셰인트·피터스버그」라고 하기에는 실감이 나지않을 만큼 소박한 도시 같게만 보였다. 「흐메이니」의 신학교 제자들과 추종신도들이 하루 다섯번씩 모여 성지「메카」를 참배 기도를 하는 「파티마」사원의 광장과 부근의 거리는「앨버트·케텔비」의 명곡 『폐르시아의 시장』 을 연상시키는 흥겨운 소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박쥐의 날개처럼 펄럭거리는 승복차림의 「이슬람」승려와 신학생들, 「호메이니」, 「탈레가니」, 「샤리아트마다리」·「몬타제리」같은 「아야툴라」급 성직자들의 초상화를 파는 노점상인들, 길바닥에서 옥수수를 구워파는 소년들- 그저그런 사람들이 이성도의 주인들 같았다.
「테헤란」에 비해서 검은「차도르」를 쓴 여인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호메이니」의 본거지다운 일면이었다.
「팔레비」왕의 아버지「레자·샤」가 여성해방의 일환으로 금지시킨 「차도르」의 착용은 바로 반 「탈레비」운동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호메이니」는 「콤」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 63년 망명이전에 살던 옛집은 단층의 벽돌집으로 정원에는 네그루의 석류나무가 잘익은 석류를 주렁주렁 달고 서있었다. 지금의 상주자는 「호메이니」의 동생 「모르테사」.

<숙명의대결 85년계속>
선풍기가 있는 맨 구석방에 「모르테사」를 중심으로 성직자들이 둘러앉아 한가한 시국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뒤 「호메이니」가 정착한 집은 「낫세르」로라는 좁은 골목길어귀에 있는 회색의 단층벽돌집. 방 둘에 응접실 하나. 마침 「호메이니」가「테헤란」에 머무르고 있는 때라 철문은 굳게 잠기고 3명의 경비원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그집의 대문에는 각종 혁명구호가 어지럽게 휘갈겨져 있었다.
「콤」시내 전체가 혁명「포스터」와 「호메이니」의 사진으로 도배질되어 있는것같은 인상이었다. 양고기가 메달린 푸줏간·이발관·「카페」·세탁소·꼬불 꼬불한 골목길의 토담·가로수 할것없이 소박한 이 도시의 삼라만상이 「팔레비」왕정타도에 동참한 흔적을 자랑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레자·샤」가 반「이슬람」적 개혁에 착수한데서 시작된 「팔레비」왕조와 「이슬람」간의 숙명적인 대결은 85년만에 「이슬람」의 승리로 일단 막을 내린 것이다.
시장거리에서 취재「팀」을 뒤다르기도 하고, 스스로 앞장서서 길 안내를하던 순박한 소년들의 얼굴에서까지도 「큰일」을 해냈다는 자랑을 읽을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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