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은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동경지점이 개설되기전에 일본에 진출했던 기업은 설경동씨의 대한산업뿐이었다.
그러나 6·25가 터지자 대한물산의 김용주씨, 동아상사의 이막원씨, 삼성물산의 이병철씨,화신산업의 박유직씨등이 서둘러 동경으로 모여들었다.
본국에서 벌였던 사업들이 모두 전화에 휩싸였으니 동경에서나마 맥을 유지해야 할 형편이었다. 본점으로부터의 지시사항도 중요했지만 가능한 범위안에서 이들에 대한 LC개설이나 긴급융자등의 일 또한 현지지점의 기본임무였다.
어쨌든 동경지점의 영업실적은 그 북새통에서도 첫 1년동안 외환수익을 중심으로 상당한 흑자를 기록했다. 어느 해외지점이나 개설 후 몇년동안은 적자를 감수하는 것인데 비하면 예외적인일이었다.
동경지점의 가장 큰 고객은 재일교포 서갑호씨었다. 그는 당초 「오오사까」에서 6천추정도밖에 안되는 소규모의 방직공장을 운영하다 동경지점이 개설, 거래를 트면서부터 사업규모를 키워나갔다.
서씨는 급할때 요긴하게 융자를 얻을수 있어 상당한 덕을 보았지만 동경지점이 첫해에 바로 흑자를 낼수 있었던것도 그와의 성공적인 거래에 힘입은 바가 컸었다.
서갑호씨하면 잊을 수 없는 일은 주일대사관저를 마련해주었던 호의다. 처음 한국대사관은 미군이 접수했던 동경은 좌거리에 있는 한 「빌딩」에 들어가 있었다고 그러나 얼마안었어 연합군사령부의 접수건물을 모두 민영화시킴에 따라 대사관 사무실은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당시 공사였던 김용주씨와 의논끝에 단골고객이었던 서갑호씨에게 집마련을 부탁키로했다.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줄터이니 당신이름으로 집을 사서 대사관저로 빌려주시오. 그리고 이자도 좀 내야겠소』.
나의 이 같은 터무니없는(?) 요구에도 그는 선뜻응해줘 4천8백만 「엔」을 주고 지금의 대사관저를 마련한 것이다.
그후 서씨는 계속 사업이 번창해 동경지점에서 빈 것으로 되어있던 돈을 다갚고나서 자기소유의 집(대사관저)마저 정부에 기증해주었다.
당시 수출이라함은 쌀과 해태. 「텅그스텐」등 물량면에서 별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고 대부분이 우리측의 일방적인 전입이 주된 무역이었다.
한번은 일본측이 우리나라 쌀을 사지 앉겠다고 버텨 하는 수 없이 미군정의 압력을 동원해 5백만 「달러」어치의 쌀을 강제로 수출한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본국에서 쌀을 배에 실어 보냈는데 선적서류를 잃어버려 수출만하고 돈을 못받을뻔 했으나 간신히 해결한일도 있었다.
무역거래의 결제방법은 한·일 무역협정에 따라 서로 수출과 수입한 액수를 상쇄한 나머지잔액이 1백만 「달러」가 넘을때만 현금결제토록 했었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는 물물교환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태였다.
입초인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늘 받을 돈보다 줄돈이 많이밀려 있는 처지였지만 1「달러」의 지출이라도 이대통령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지불해야 할 돈이 번번이 약속한 1백만 「달러」를 넘겼지만 그때마다 갖가지 핑계를 둘러대며 지출을 늦췄다.
심한 경우에는 6백만 「달러」까지 지불을 유예시킨 일도 있었는데 그것마저『너희들이 줄 배상금과 상쇄하자』고 버틸정도였으니 일본측으로서는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국제관제에서 도저히 섕각도 못할 배짱을 이대통령은 유유히 부렸고 또 그것이 어느 정도는 통했던 시절이었다.
일본배가 한국항구로 자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일본 경기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갔다.
이른바 한국전쟁의 특수「붐」이 일고 있었다.
휭하니 비었던 술집들이 어딜가나 앉을 틈이없을 정도로 꽉들어 차기 시작했다. 참으로 무서운 속도로 전후의 폐허를 털어대고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