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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이기웅 열화당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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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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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을 떨치는 / 저것이 바람인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바람 같은 진실을 찾아나서자

전선을 울리는 / 저것이 바람인가

모습을 잃어 / 소리로만 사는 것인가

바람이여 /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람이고 싶은 / 나는 무엇인가

바람이어야 하는 / 나는 또 무엇인가

모습을 벗고 / 소리마저 버리면

허(虛)는 마냥 실(實)인 것이니

바람이여 / 가서 오지 않은들

또 어떤가

- 임종국(1929~89) ‘바람’

파주출판도시 조성의 절정기였던 새천년 첫날 새벽에, 이 도시의 첫 건물인 인포룸 전망대 위에 서서 나는 이 시를 다시 읊고 있었다. 새벽빛이 오두산 너머 북녘 하늘을 어슴푸레 밝히면서, 출판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정지해 놓은 빈 대지 위를 비춰 왔다. 역사의 점 하나에 불과한 내가, 우리가, 오늘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더구나 슬픈 분단의 땅 위에 책의 도시를? 터 닦아 놓은 이 고난의 대지에 어떤 ‘지혜로운 책마을’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그 고뇌의 시기에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林鍾國)님의 이 시는 위로와 함께 큰 용기를 주었다.

 일제하 지식인들의 기막힌 행태를 알고 난 다음, 온갖 역사의 서글픈 진실을 깨닫고 난 다음, 스스로의 존재를 향해 쏟는 가식 없는 외침 아니던가. ‘잎’이나 ‘전선(電線)’ 같은 사물 뒤에 존재하는 ‘바람’의 진실을 읽어내는 인간됨과 민족됨, 그리고 인류됨을 지향하자던 이 선배 시인의 소망이요 가르침 아니던가.  이기웅 파주출판도시 이사장·열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