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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아이들이 열광한다 대체 '롤'이 뭐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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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는 자녀 때문에 속상하신가요. 그 열정으로 공부 좀 하라고 타이르기라도 할라치면 “엄마가 뭘 알아, 이거라도 할 줄 알아야 친구랑 말이 통한단 말이야”라며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지만 속으론 살짝 걱정도 됩니다.

요즘 애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다는 온라인 게임 ‘롤’을 모르면 정말 우리 애가 왕따라도 당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롤에 빠져있는 아이들의 세계에 직접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대체 롤이 뭔지, 왜 열광하는지, 정말 모르면 교우관계가 위기에 빠지는지 말이죠.

학교가 끝나는 오후 3~4시쯤이면 학교 인근 PC방마다 게임을 즐기는 학생으로 넘쳐난다. 이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건 단연 롤(LOL·리그 오브 레전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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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정말 안 하면 ‘따’ 당해? 그래?

부모들은 “미치겠다”고 하소연합니다. 말 잘 듣던 중학생 아들이 생전 처음으로 엄마 몰래 학원을 빼먹은 겁니다. PC방에서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s·이하 롤) 하느라고요.

“한번만 더 롤하다 걸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엄마의 엄포에 아이는 울상이 됩니다. 롤을 안 하면 학교에서 왕따가 된다나요. 엄마는 기가 찹니다.

아니, 이까짓 게임이 대체 뭐길래 따돌림 운운하며 엄마를 협박하나요. 정말 그럴까요. 그래서 초중고생 40명을 직접 만나 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입니다.

이 아이들 얘기를 모아 1인칭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자, 이걸 한번 읽어 보시죠. 말려야 할지, 허용해도 좋을지 판단은 그 다음에 하시고요.

“야, 브론즈.” 뒤돌아보니 우리 반 재홍이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정색하자 재홍이가 비웃으며 답한다. “브론즈를 브론즈라고 부르지, 그럼 청동이라고 불러줄까.” 웃는 얼굴을 한 대 확 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브론즈가 내 이름이냐고. 그럴 리가. 부모님이 지어준 민구라는 이름이 있다. 하지만 요즘 친구들에게 브론즈라고 더 자주 불린다. 브론즈. 그렇다. 나는 사실상 최하위 계급이다.

롤 모르면 대화 안통해

PC방 관리자의 모니터 화면엔 현재 이용자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 지가 나타난다. 이날도 대부분 롤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온라인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s·이하 롤)에서 시작됐다. 남자 중학생 사이에서 ‘안 하면 왕따된다’는 바로 그 게임 말이다. 반 애들 절반이 한다. 그러니 학교생활이 롤로 시작해 롤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주 전학 온 준서는 애들이랑 롤 몇 번 같이 하더니 십년지기 친구처럼 친해졌다.

나는 1년 전 중1 중간고사 마친 후 친구가 PC방으로 데려간 덕에 롤을 알게 됐다. 원래 컴퓨터 게임을 즐겨 하지 않지만 성적 스트레스를 날리고 기분 전환도 할 겸 따라갔다. 처음엔 전혀 감이 안 왔다. “헐. 이걸 어떻게 다 외워.” 친구는 “하다 보면 다 알게 돼”라고 했다. 한 두세 달 미쳤다고 생각하고 올인하면 만렙(일반 게임 최고 레벨)은 찍을 수 있다는데 나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후 아예 잊고 살았다.

하지만 이게 웬일. 학기말이 다가오자 반 친구 열에 일곱은 롤을 하고 있었다. 대화의 90%는 롤이었다. “소환사의 협곡 말고 다른 맵은 사람이 없어” “블리츠크랭크는 그랩 기술이 진짜 간지나더라(‘멋있다’는 은어)” “나 어제 캐리(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의미)했잖아. 완전 뿌듯했어.”

친구들 대화에 끼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대화가 외계어 같았고, 내 앞에만 보이지 않는 벽이 쳐있는 것 같았다. 애들이 다 웃길래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따라 웃은 적도 있다. 나 자신이 패배자처럼 느껴졌다. 공부 잘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날로 당장 롤을 시작했다. 그렇게 반 년 정도를 일주일에 2~3번씩 PC방이나 집에서 게임을 했다. 당시 국어·영어·수학 학원을 다니고 있어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노력해 올초 만렙이 됐고, 배치고사(만렙 달성 이후 랭크게임 등급을 나누는 시험)를 치러 드디어 브론즈가 됐다. 애들과 대화가 통했다. 100명이 넘는 챔피언(챔프·게임 캐릭터를 일컫는 말) 특징을 술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그게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 줄이야.

어느 순간부터 티어(브론즈·실버·골드·플래티넘·다이아몬드·챌린저로 나뉘는 게임 등급)가 오프라인상에서조차 평가받는 기준이 됐다. 인도 카스트제도처럼 말이다. 티어의 가장 상위인 챌린저는 한국 서버로 게임을 하는 전체 플레이어 가운데 1~250위까지로, 상위 0.01% 실력자다. 보통 다이아몬드 이상을 천상계, 브론즈와 실버를 합쳐 심해계라고도 부른다. 난 이중 브론즈다.

좋은 티어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기면 된다. 만렙 도달 후 치르는 배치고사에서 승리를 많이 하면 된다. 30레벨(1레벨부터 시작, 만렙과 동의어)이 된 후 하는 열 번의 게임이 배치고사다. 또 매년 초 새 시즌을 시작할 때도 배치고사를 치른다. 보통 10전 3~4승이면 브론즈, 5~7승은 실버, 8~10승은 골드에 배치된다. 나는 4승 6패로 브론즈 4가 됐다. 그나마 브론즈 5(등급내에서 1~5단계로 또 나뉘는데 숫자가 클수록 낮은 레벨)가 아닌 게 어딘가. 물론 우리 반에 브론즈가 나 하나는 아니다. 아직 만렙도 못 찍은 언랭이(‘언랭크드’에서 따온 말, 배치고사 안 치른 1~30 레벨을 의미)도 꽤 된다. 그런데 유독 내가 놀림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반 롤 1위에게 했던 무모한 도전 때문이다.

한달쯤 전이었다. 그날따라 애들이 브론즈라고 부르는 게 거슬렸다. 무슨 얘기만 하면 “브론즈는 닥쳐” “브론즈는 허락 받고 얘기해”라고 한다. 심지어 “브론즈 냄새 난다”고 내가 지나갈 때 코 막는 시늉까지 한다. 장난이라는 걸 알기에 정색하고 화를 낼 수도 없다. 하지만 나랑 별 실력 차도 안나는 실버가 부심(자부심)부리는 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그러던 중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장 플래티넘이 될 수 없다면 플래티넘을 이기면 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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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계급의 설움

당장 우리 반 롤 서열 1위인 상호에게 “롤 한판 하자”고 제안했다. 플래티넘3인 상호는 “브론즈랑 같이 하기엔 자존심 상한다”며 거절했다. 나는 말했다. “FIFA 랭킹 41위였던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것처럼 상위 92.04%의 저력을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상호는 결국 게임에 응했다. 결과는 나의 대참패였다. 상호는 그날 경기에서 우리팀 5명을 동시에 죽이는 ‘펜타킬’을 하는 등 대활약을 펼쳤다.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다음날.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엄마한테 “게임 져서 창피해 학교 못 가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교실에 들어서니 상호가 어제 게임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난 우리 반 대표 브론즈가 됐다. 벌써 한 달 전 일인데 아직도 그 얘기만 한다. 제길, 실력을 키울 수밖에.

사실 좀 더 쉬운 방법이 있기는 하다. 티어를 사거나 대리랭을 쓰는 거다. 티어 낮은 사람이 높은 티어 ID를 돈 주고 산다는 얘기다. 친구끼리는 물론이고 아이템 매니아(게임 아이템 거래소)에 가면 ‘다이아 8만원’식으로 팔겠다는 글이 많다. 당연히 불법이다. 대리랭이란 잘 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내 ID로 나 대신 게임을 하게 하는 거다. 대리랭 뛰는 게 꽤 쏠쏠한 용돈 벌이가 된다더라.

마음 같아선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다이아몬드 ID를 사 당장 군림하고 싶다. 하지만 소용없다는 걸 안다. 내가 브론즈인 건 천하가 다 아는데, 갑자기 높은 티어가 되면 오히려 무시당한다. 결국 내 손으로 해내는 수밖에 없다. 난 한 달 안에 ‘골드를 찍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지금까지 엄마 눈치 보느라 마음껏 못했는데, 방학 동안 시간투자를 좀 할 생각이다. 물론 시간만 들인다고 레벨이 오르지는 않는다. 틈틈이 경기를 보며 전략을 짜야 한다. 공부나 롤이나 역시 예복습이 최고다. 밤에 잠이 안 오면 인터넷 방송인 아프리카TV의 게임 방송을 보면서 공부할 때도 많다.

부모에게 거짓말하며 PC방 들락

학교 끝나고 곧장 게임방으로 향했다. 원래 집에 들러 저녁 먹고 학원에 가야했는데 엄마한테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바로 학원에 간다”고 전화했다. 엄마한테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무너진 내 자존심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사실 엄마에게 거짓말 하고 게임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친구들이랑 주말에 PC방 갈 때 굳이 PC방이라는 장소는 말하지 않고 그저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을 뿐이다. 엄마도 내가 가끔 PC방 가는 걸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문제는 중2 되서 처음 열린 학부모 총회였다. 집에서 롤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무슨 게임이냐”고 묻길래 별생각 없이 “롤”이라고 답했다. 아무 말 없길래 웬일인가 싶었는데 다음날 사달이 났다. 담임 선생님이 “리그오브레전드는 절대 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엄마는 처음에 리그오브레전드가 롤인 줄 몰랐다가 뒤늦게 알고는 노발대발한 거다.

그날부터 엄마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내 방 컴퓨터를 거실로 옮기고는 “당장 롤을 지우라”고 명령했다. 말 안 들으면 집에서 내쫓겠다길래 엄마 시키는 대로 바탕화면에서 롤 아이콘을 지웠다. 바탕화면 아이콘 지워도 게임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엄마가 그걸 알 리가 없겠지만. 나는 거짓말로 전쟁을 끌고 나갔다. 엄마 없는 틈을 타 집에서 롤을 했고, 학원 보충 수업 있다며 PC방에 갔다. 엄마가 일찍 잠든 날이면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한 적도 있다. 셧다운제 같은 건 문제가 안 된다. 엄마 명의로 만든 아이디라 밤새 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엄마 전화기 몰래 가져다 문자로 인증번호 받은 후 문자만 삭제하면 된다.

엄마는 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한다. 롤은 엄마에게 학부모 모임, 아빠에게 골프 같은 존재다. 인간관계 유지를 위한 필요악인 셈이다. 엄마가 매일 커피숍에 앉아 다른 엄마들이랑 교육 정보 나눈다는 명목으로 수다 떠는 것과 비슷하다. 학부모 모임에 한두 번 빠지면 모임에서 금세 제외되지 않나. 롤도 마찬가지다.

롤을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스트레스 해소용이다. 초등학교 땐 축구라도 자주 했지만 중학생이 되니 학원 가느라 다들 바쁘다. 공부 말고 할 게 없다. 영화나 노래방은 어떤가. 영화 한번 보는 데 1만원, 노래방 비싼 곳은 2만원쯤 내야 한다. 하지만 게임은 1시간에 1000원이면 족하다. 비는 시간에 집이나 가까운 PC방에서 한 두 시간 즐기며 스트레스 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엄마 생각처럼 롤이 그렇게 나쁜 게임도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협동심 을 배울 수 있다. 남자들이 축구를 왜 좋아하나. 협동해서 상대방 이기는 게 재미있는 거다. 스타크래프트나 서든어택도 팀 별로 하지만 결국은 각개전투다. 롤은 다르다. 혼자 잘한다고 이길 수 없다. 팀원 모두 각자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승리할 수 있다. 협동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진리를 깨닫는 거다.

롤은 또 공정하다. 메이플스토리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같은 게임은 실력이 좋아도 현금 쏟아 붓는 사람을 당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돈으로 아이템 척척 사서 잘하는 애들 보면 힘이 빠진다. 하지만 롤은 다르다. 돈 쓴다고 실력이 올라가지 않는다. 챔피언 사고 챔피언 옷 사는 게 전부인데, 그마나 챔피언은 PC방 가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 굳이 따로 구매할 필요도 없다. 친구 중 하나는 명절에 받은 돈으로 100명 넘는 챔피언을 샀다. 그렇다고 게임을 잘하는 건 아니다. 진짜 실력으로 승부하는 투명한 게임이다.

롤의 매력은 이것 외에도 많다. 무엇보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게임 잘해서 같은 팀 사람에게 “덕분에 이겼다” “고맙다” 얘기를 들으면 마치 내가 영웅이라도 된 것 같다. 내가 어디에서 이런 대접을 받겠나. 엄마는 성적 안 오른다고 잔소리밖에 안 하는데 말이다.

롤 폭력성에 대한 오해

용산e스포츠스타디움에서 열린 ‘HOT6 롤 챔피언스 서머 2014’ 경기장 모습.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해가 폭력성이다. 하지만 롤에는 잔인한 장면이 하나도 없다. 피 한 방울 안 나온다. 물론 미니언(챔피언 이외의 병사 캐릭터)과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상대방을 죽여도 그 과정에서 상대의 에너지 바가 줄어들 뿐 금방 부활한다. 그래픽도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 속 무대처럼 꾸며져 있다. 친구 중에는 롤 시작 후 폭력성이 줄었다는 애도 있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문제를 꼽으라면 저질 채팅문화다. 나도 욕을 많이 하지만 진짜 심각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익명이 보장되니 다른 사람에게 막말하는 애들이 많다. 게임이 안 풀리면 일단 욕부터 한다. 다이아몬드나 플래티넘보다 브론즈나 실버가 더 많이 한다. 만약 같은 팀원이 마음에 들게 잘 하지 못하면 “너 엄마 없냐” 소리부터 나온다. 집에서 어떻게 가정교육 받길래 그렇게 형편없느냐는 얘기다. 이런 걸 패드립(부모 욕)이라고 한다. 차마 밝힐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욕설도 난무한다. “눈 없냐” “손가락 없냐”는 애교 수준이다. 친구 중 한명은 롤 일주일 안 했더니 욕 할 일 없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대부분 순간적인 감정이다. 교실에서 그렇게 욕하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 못할 거다. 우리도 그게 옳지 않다는 건 다 안다. 그저 멈출 수 없을 뿐이다.

글=안혜리 기자 ·전민희·조한대·장상용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 라이엇게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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