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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2)영화 60년 제67화(3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4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영화에 대한 총독부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수난기로 꼽히는 40∼44년 사이에 제작된 영화는 모두 25편이다. 그 가운데 14편이 42년에 발족된 관제어용법인인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나머지 11편만이 조선영화주식회사가 발족하기 이전에 제작 활동을 해온 민간제작자들에 의해 제작된 영화들이다. 따라서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의해 제작된 영화들은 모두가 전쟁수행을 위한 이른바 계몽영화 들이었다.
총독부는 40년1월4일 총독부제령 제1호로「조선영화령」을 공포했다. 이 영화령은 영화의 제작·배급은 물론 흥행이나 영화관계 업종에 취업하는 일까지도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하며, 허가를 받았다 할지라도 영화령이 정하는 바에 따르지 않으면 곧 허가를 취소하는 동시에 엄벌한다는 내용으로 일관돼 있었다.
총독부는 또 이 영화령 시행규칙 제8조 제2항 제2호의 규정에 의해 영화인 등록과 함께 영화인에게 기능증명서를 발급하기도 했다.
총독부의「조선영화령」이 새로 공포되고 이에따라 영화제작회사의 강제통합방침이 밝혀짐에 따라 각 영화사는 우선 자위책으로 조선영화제작자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영화제작자협회에 가입된 회사는 고려영화협회 (이창용) 명보영화합자회사(이병일) 한양영화사 (차상은) 동양「토키」영화촬영소 (이창근) 등 11개 회사였다. 그러나 이 협회는 1년9개월만에 조선영화주식회사란 관제어용법인의 발족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 지경으로 영화계가 풍지박산 되니 영화예술만을 옹호하던 순수 영화예술인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 방황하게 됐다. 터뜨릴 곳 없는 울분 때문에 영화인들은 자학에 빠지곤 했다.
나도 이 중의 한사람이었다. 나는 총독부의 영화정책에 반항이라도 하려는듯 순수문예영화1편을 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계용묵의 대표작인『백치아다다』를 골라「시나리오」로 고쳐 썼다. 완성된「시나리오」를 갖고 계용묵을 만나 내 뜻을 얘기하고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시나리오」를 읽어본 계용묵은 『아주 훌륭합니다. 원작보다 문학적 향기가 더한 것 같습니다』며 껄껄웃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로 나와 동갑이었다.
그때는 이미「시나리오」사전검열이 시작된 뒤였다. 나는 사전검열을 받기 위해「시나리오」를 갖고 총독부 검열주임「오까다」(강전)를 찾아갔다.
등을 뒤로 젖히고 오만하게 앉아있던「오까다」주임은 내가 들이 민「시나리오」줄거리를 읽더니 아예 내용을 펴볼 생각도 안했다. 그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 따위 영화를 만들려고 그래! 바야흐로 조선민족이 일본제국을 위해 충성할 때가 왔는데 이따위 문화영화를 만들어 어떻게 하겠다는거야』라는 것이었다.
『사상성이 없는 순수한 문예영화이니 다시 검토해보라』고 했지만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노른 나는『알았다』고 한마디하고 돌아서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시나리오」를 한움큼 쥐고 보란 듯이 쫙 찢어버렸다.
「오까다」주임도 잠시 놀랐는지『「오이」, 이「상」』하고 불렀다. 돌아보니『ドウシタソタ?』(왜 그러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엉성한 웃음을 흘린채 검열과를 나오고 말았다.
이 일이 있고 나니 더욱 분이 치밀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음악영화를 한번 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음악영화야 설마 다른 트집을 잡을 수 없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번엔 미리「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구두로 음악영화 제작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오까다」주임을 찾아갔다. 들어서는 나를 보고「오까다」는『또 왜왔어?』했다. 청이 있다고 했더니『무슨 얘기인지 모르지만, 안들어주면 또 신경질 낼거야』하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생각해둔 음악영화얘길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오까다」주임은 금세 웃음을 딱 그치며『이것봐, 이「상」. 지금 조선민족이 노래나 부르고 있을 형편인가』하고 소리질렀다. 결국 문예영화도 음악영화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음주클럽」「멤버」들의 주량은 더 늘어가기만 했다.<계속>이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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