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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국립박물관 약탈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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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라크 국립 박물관이 약탈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7천여년 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바빌로니아.수메르.아시리아 등 고대 왕국의 유물 5만점 이상이 미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불과 48시간만에 주민들에게 털린 것이다.

이에 앞서 마쓰우라 고이치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바그다드가 함락된 직후 미국에 보낸 서한을 통해 주요 박물관에 병력을 배치해 문화재 약탈을 막아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번 사태로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약탈된 문화재는 황금 사발.잔 등은 물론, 장례식에 쓰이는 가면, 고대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 등 온갖 종류가 망라돼 있다.

현재 현지 문화재 전문가들은 박물관 안에서 남은 유물과 잃어버린 유물의 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그다드에는 이라크 국립박물관, 아랍 고고학 박물관, 바그다드 박물관 등 8개의 중요 박물관이 있다.

이 중 1992년에 폐관했다가 2000년에 재개관한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BC 5천년부터 시작해서 수메르-아카드-바빌로니아-아시리아를 거쳐 이슬람 시대에 이르는 유물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는 중동 지역 최대 규모의 박물관으로 평가된다.

이라크 문화재청은 무장 군인을 배치하여 24시간 감시 체제를 가동해 왔으며 유물 반출자는 사형에 처하는 법까지 제정했다.

이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무라비 법전'인데 이것의 훼손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수메르 도시의 하나인 우르크에서 출토된 여자 두상의 경우 이번에 약탈된 것 같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전쟁 발발 직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던 목원대 김정동 건축과 교수는 "바그다드의 박물관 약탈은 이번 전쟁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폭격으로 인한 문화재의 피해도 속속 드러날 전망이다. 바그다드 남쪽 90㎞의 바빌론에 있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인 공중정원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북부 모술의 하트라성의 파괴 여부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연합군이나 이라크측으로부터 구체적인 발표가 없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그러나 티크리트와 모술에 위치한 박물관들이 폭격으로 큰 화를 당했다고 밝혔다.

북부 바그다드에 위치한 주요 이슬람 사원 카디미아 모스크와 마르잔 모스크의 경우 폭격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바그다드 구 시가지를 폭격하기 전에 전쟁이 사실상 끝나는 바람에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큰 피해는 아니더라도 곳곳에 포탄과 총탄 자국이 흉물스럽게 박혀 있을 우려는 여전히 높다.

이라크 현지 문화재 전문가들은 "실상을 파악하는데 수 개월 걸릴 것"이라며 "박물관 직원이 약탈에 관여한 흔적마저 있어 상황은 더 심각하다"고 말하고 있다.

91년 걸프전 이후 혼란을 틈타 니네베와 님루드, 호르사바드 등지의 박물관들과 문화유적들이 대거 약탈을 당해 수천점이 국외로 밀반출됐었다.

당시 이라크측은 4권 분량의 약탈된 문화유물 도록을 만들어 유네스코와 각국의 유명 미술관들, 경매소, 국제경찰(인터폴)등에 배포해 회수작업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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