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 거수기 된 공직자윤리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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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자원부 J모 국장은 지난 3월 말 23년 공직 생활을 접기로 하고 사표를 냈다. 민간기업인 A사에서 인생 2막을 펼쳐보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공직자윤리법 규정에 따라 취업 심사도 통과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공무원도 퇴직 전 5년 동안의 업무와 연관이 없는 민간기업엔 심사를 거쳐 재취업할 수 있다. 그러나 J 국장의 재취업은 뜻하지 않은 벽에 부딪쳐 좌절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관피아 척결’ 여론이 불거지자 부담을 느낀 A사가 채용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J 국장의 사연이 알려지자 공무원 사회에선 민간기업 재취업 심사 신청이 크게 줄었다.

 지금도 공직자의 재취업은 법으로 보장돼 있다. 그런데도 관피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건 정부의 불투명한 공직자윤리위 운영에도 원인이 있다. 안전행정부 소속 공직자윤리위는 정부위원(4명)·민간위원(7명)을 합쳐 모두 11명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김희옥(동국대 총장) 위원장을 뺀 다른 위원은 공개되지 않는다. 위원을 비공개로 하고 심사 내용과 결과도 공개하지 않다 보니 외부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정부는 “위원을 공개하면 이들을 대상으로 한 로비가 극성을 부릴 우려가 커 비공개로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심사 탈락 비율이 전체의 7%밖에 안 돼 ‘거수기’라는 비판마저 나온 걸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관피아 대책이 성공하려면 공직자윤리위원회의 독립성부터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가 제출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엔 공직자윤리위의 개편 내용이 없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현재 안전행정부 소속 공직자윤리위원회는 무늬만 위원회다. 공직자윤리위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고 외부 심사위원들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위원·민간위원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전문성 있는 민간위원을 두루 영입해 개방성을 확대할 필요도 있다. 가까운 일본의 ‘재취업 등 감시위원회’가 좋은 참고 사례다. 1명의 위원장과 4명의 위원 명단이 모두 공개될 뿐 아니라 총리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금고 이상의 형을 받지 않는 한 신분이 보장된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공무원의 민간기업 취업을 허용하되, 과거 업무와 관련된 부당한 일을 하는지를 사후에 감시하는 형태다.

 공공기관도 이번 기회에 관료 출신이 갈 수 있는 곳과 제한해야 할 곳을 투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 업무를 위임받은 기관은 해당 부처 공무원 출신 기관장이 교수나 정치인 출신보다 업무 파악 능력이 더 좋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예컨대 건강보험공단·근로복지공단 같은 준정부기관은 공무원 출신이 가는 것을 허용하고, 공항공사나 발전회사처럼 민간과 경쟁하는 시장형 공기업은 내부 승진이나 민간 기업인을 영입하도록 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대신 관료 출신이 공공기관에 재취업할 땐 심사를 하는 임원추천위원회 구조를 확 바꿔야 한다. 낙하산 일색의 사외이사 자격요건을 엄격히 전문가로 제한하는 한편, 기관 직원들이 직급별로 면접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문가와 내부 직원의 점수를 합산해 공공기관장을 선출하면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취지다.

 공공기관 평가 시 신상필벌을 강화해 무능한 낙하산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은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아도 퇴직 기관장이 평가기간만큼의 성과급만 못 받을 뿐 별다른 제재 조치가 없다.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기본급은 낮추고 성과급은 장기간에 걸쳐 나눠주는 제도를 도입해 퇴직 뒤에도 경영이 부실하면 연봉을 반도 못 받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에 피해를 준 기관장에 대해서는 퇴직 후에라도 추적해 배상을 하도록 의무화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관료의 지식과 경험을 민간에서 잘 활용한다면 사회적으로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민간이 전직 공무원의 힘을 빌려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적발됐을 때는 일벌백계의 징벌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장세정·김원배·박현영·강병철·유지혜·이태경·최선욱·윤석만·허진·김기환 기자, 뉴욕·런던·도쿄=이상렬·고정애·서승욱 특파원

◆퇴직공무원의 취업심사=일반 부처 4급 이상, 경찰·세무·건축 등 특수 직종의 7급 이상 공무원은 퇴직 후 민간기업 등으로 갈 때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심사를 받아야 한다. 무단 취업 사실이 드러나면 취업한 곳에서 퇴직해야 하며 과태료까지 부과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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