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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무한대 표현력 무한대 사진 만드는 남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3호 14면

황규태 작가가 가로 12m, 세로 3m 크기의 디지털 프린트 ‘멜팅 팟’(2012) 앞에 서 있다. 인사동에서 구입한 만국기 200여 개를 하나하나 촬영한 뒤 컴퓨터 작업을 통해 만들었다.

우리 나이로 77세인 사진작가 황규태는 여전히 젊다. 늘 야구 모자에 하얀 티셔츠, 청바지 차림이어서가 아니다. 혼자서 미제 지프를 씽씽 몰고 다녀서도 아니다(오토매틱이긴 하다). 바로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걸 찾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북서울미술관서 사진전 여는 ‘영원한 현역’ 황규태

동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전공보다 학보사에서 사진 찍는 게 더 좋았다. 경향신문 견습 사진기자로 입사해 한 3년 잘 지내다가 1965년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그냥 친구 이민수속 도와주다 미지에 대한 동경심이 생겨서”다.

교포들도 별로 없던 당시 LA의 한 컬러현상소에서 암실 기사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심심풀이 장난으로 필름을 살짝 태워봤는데, ‘이걸 프린트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버닝(Burning)’ 시리즈입니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레이오그래피’라고 명명한 것처럼 저는 ‘버노그래피(Burnography)’라고 이름 붙여 봤죠.” LA 다운타운을 찍은 필름을 조금 태웠더니 폭탄이 떨어진 도시처럼 보였다. 의도하지 않은 훼손이 본질을 왜곡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불타는 도시1’(1969)은 그렇게 나왔다.

70년대에 이미 기존 스트레이트 사진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며 발칙한 작업을 계속 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은 물론 현상소에서 얻은 남의 필름까지 도용, 차용, 전용해 ‘몽타주’를 만들었다. 모든 생명체는 바다로부터 태어났다는 생각을 시각화한 ‘신형발생’(1972)이 대표적이다.

1‘점들’(1995~1999), Digital Print, 120 x 300 cm 2‘우리 시대의 무당’(2012), Digital Print, 300 x 500 cm 3‘성배’(2010), Digital Print, 120 x 92 cm

독립해서 자신만의 현상소를 차린 뒤에도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객실이 150개가 넘는 호텔을 공동으로 인수했고, 벤처 캐피털을 세워 정부와 매칭펀드를 만들었는가 하면, 국내 유력지의 미주지사장도 맡았다.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험한 일도 겪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만이 그를 위로했다. 이번엔 암실 대신 컴퓨터라는 새로운 ‘요술 방망이’가 그를 도왔다. 스캐너와 포토숍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저용량 디지털 파일을 크게 키워 화면을 ‘깨뜨리는’ 것은 잭슨 폴록의 흩뿌리는 페인트 작업과 맥락을 같이 한다. 디지털 픽셀의 확대 혹은 축소로 표현한 점묘화된 전자 시대의 초상화 ‘픽셀 레이디’(2000), 문방구에서 산 동그란 스티커를 접사촬영해 디지털 픽셀처럼 보이게 만든 ‘점들’(1995~1999)에서는 그만의 유머가 느껴진다. “뭘 표현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다 보니 뭔가를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필름용 돋보기로 루페(Lupe)라는 게 있어요. 이걸로 TV 화면을 한번 들여다 봤더니 픽셀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원자 알갱이 같더라고요. 4x5 중형 카메라로 확대해서 찍은 게 ‘티 비 픽셀 오-화이트’입니다.”

유명한 작품을 ‘카피’하기도 했다.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발팽송의 욕녀’에 대한 오마주로 만 레이가 애인 뒷모습을 찍은 뒤 바이올린 f홀을 그려넣고 재촬영한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그의 손에서 ‘$$ 바이올린’으로 변신했다. “f홀 대신 달러를 뜻하는 $를 그려넣어 무소불위의 금력을 은유했죠. 신(God)에 L(Lord·신)을 더하면 금(Gold)이 돼잖아요. 신은 죽었고(니체), 금(金)이 신(神)이라는 의미입니다.”

서울대와 이대 미대, 중앙대와 상명대 사진학과에서 틈틈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작업도 계속 했다. 규칙적은 아니지만 흥이 나면 밤늦게까지 몰두하는 스타일이다. 아트선재센터, 가나아트센터, 신세계 갤러리 등에서 전시도 이어갔다. 계속 신작을 선보이는 그에게 유희영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이 기증을 요청했다. “처음에 30점 정도 달라고 했는데 제 예술 세계를 보여줄 만한 작품을 하나 둘 따지다 보니 어느새 60점이 넘더라고요.”

그의 기증작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노원구 중계동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7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열리고 있는 ‘사진 이후의 사진’(24일 오후 2시 작가와의 대화)이다. 작가 인생 50년을 결집한 대규모 회고전인 셈이다.

미술관에 들어가면 최대 가로 12m, 세로 3m에 달하는 ‘기(banner)’시리즈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재스퍼 존스의 ‘성조기’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았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태극기 혹은 만국기가 밀집돼 있다. “재스퍼의 작업이 드라이하다면 저는 쿨과 웜을 넘나들고 있죠. 요즘 저의 메인 테마인데, 어떻게 끝날지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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