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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 죽을 병 걸렸다” … 장제스, 부인 앞에서 싱글벙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949년 1월, 장제스가 하야(下野)하자 국민당 원로들이 장쉐량의 석방을 요구했다. 당총재직을 유지하며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장제스는 장쉐량을 극비리에 타이완으로 이송했다. 폐허가 된 가오슝의 옛 일본군 포병기지에 연금돼 있던 장쉐량. [사진 김명호]

인간은 지난 일들을 가공할 줄 안다. 없던 일들을 만들어내고, 엄연한 사실을 뭐가 뭔지 모르게 둔갑시키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다.

사실을 밝혀낼 줄도 안다. 다만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 장쉐량과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는 예외였다. 당사자들이 일기와 서신, 구술등을 남겼지만,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부족했다. 세월이 흐르자 공산당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밝혀졌다. 그래도 먹는 것과 남녀관계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민족이다 보니 “도대체 쑹메이링과는 어떤 사이였느냐”는 문제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남들은 알 필요도 없는 일”이고, 결정적인 증거도 남기지 않았지만, 추측이 가능한 흔적마저 지워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장쉐량의 연금생활은 1937년 1월 1일부터 시작됐다. 첫번째 연금지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고향인 시커우(溪口)의 뒷산이었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의 연금을 가볍게 생각했다. 장제스가 “저놈이 공산당과 내통하고, 나를 감금해 협박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죽는 날까지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할 때도 흘려 들었다.

하루는 장제스가 싱글벙글했다. “장쉐량이 위장병에 걸렸다. 증세가 심해 죽을지도 모른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한숨을 내쉰 쑹메이링은 상하이의 소문난 명의를 장쉐량의 연금지로 파견했다. 며칠 후 인편에 편지도 보냈다. “귀한 몸에 몹쓸 병균이 침투했다니 염려된다. 조만간 위원장과 함께 시커우에 가겠다. 봄바람 맞으며 자연을 즐기자.”

시커우에 온 쑹메이링은 “장쉐량이 뒷산에 있다. 불러서 밥 한 끼 하며 얘기라도 나누라”며 장제스를 졸랐다. 어쩌다 보니 원수지간이 됐지만 변덕이 심한 성격들이라 서로 마주하면 풀릴 것도 같았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배석했던 경호원 중 한 사람이 구술을 남겼다.

“위원장과 장쉐량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반가워했다. 서로 음식을 권하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최고 지도자와 죄수의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했다. 부인이 아니었다면 성사될 수 없는 자리였다. 헤어질 무렵 위원장이 세상 일은 잊고 독서에 전념하라며 장쉐량의 등을 두드리자 부인의 안색이 변했다.”

타이완 생활에 익숙해진 쑹메이링과 장제스. 1950년대 중반. 장소 미상.

쑹메이링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이 끼고 돌건 말건 장쉐량의 연금을 풀어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쑹메이링도 만만치 않았다. 장제스가 그러건 말건 장쉐량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더 굉장했다. 쑹메이링이 장쉐량과 편지를 주고받건 말건,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줘 본 적이 없는 쑹메이링이 몇 날 며칠 잠도 안 자며 그린 그림을 장쉐량에 보내건 말건, 장쉐량이 보낸 소동파(蘇東坡)의 필적 진본을 가는 곳마다 끼고 다니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시안사변 22년 후인 1958년 11월 23일,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장쉐량의 만남을 주선했다. 구전되는 얘기가 있다.

“노인이 된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한동안 마주보며 눈시울만 붉혔다. 쑹메이링이 자리를 뜬 후에도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장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느 시대건 정당의 합작은 불가능하다. 20여년 전 시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당과 국가에 손실이 컸다며 한숨을 내쉬자 장쉐량도 고개를 떨궜다. 장제스는 독서에 더 매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문에 귀를 대고 얘기를 엿듣던 쑹메이링도 훌쩍거렸다.”

장제스는 죽는 날까지 장쉐량의 연금을 풀어주지 않았다. 1975년 봄, 장제스가 세상을 떠났다. 쑹메이링은 장제스 집안과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뉴욕에 거주하며 타이완 땅을 밟지 않았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마저 죽자 장쉐량의 연금을 풀어주기 위해 잠시 타이완을 찾았다.

2001년 10월 14일, 장쉐량이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뉴욕의 쑹메이링 저택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철수할 기미가 안 보이자 관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질문이 쏟아졌다. “장쉐량 장군의 사망을 부인이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대답은 간단했다. “부인은 뉴욕타임스를 거르는 법이 없다. 장군의 사망 소식을 보고 애통해 했다. 거동이 불편해 영결식 참석은 불가능하다. 타이페이에 있는 구전푸(辜振甫· 고진보, 해협교류기금회 타이완 측 대표. 타이완 4대 가문의 한 사람)에게 대신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쑹메이링은 104세였다. 2년 후, 쑹메이링도 세상을 떠났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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