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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하나 좋아서 여기 와서 막노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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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택식물원 강정화 식물팀장.

꽃샘 추위가 가셨다. 볕이 제법 따스하다. 빌딩 숲에는 여전히 바람이 거세고, 아스팔트 바닥에서 풀을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경기 용인시 백암면 한택식물원(www.hantaek.com)에서 꽃소식을 접했다. 한택식물원은 1979년부터 가꾸기 시작, 1984년 정식 개원한 국내 최대의 개인 식물원이다. 대지 20만평에 자생식물 2천400종, 외래식물 4천600종 등 총 7천여종, 700만 그루가 있다. 일반인의 관람은 2003년부터 허용했다.

춘천 날씨에 준한다는 식물원에는 이제 풀이 돋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찌감치 꽃을 피우는 복수초, 풍년화, 앉은부채 등의 자생식물과 호주 온실, 남아프리카 온실의 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문의: 031-333-3558, 031-671-5665~7)

[관련화보]한택식물원

그는 식물원에서 태어나 자랐고 일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한택식물원 강정화(35.여) 식물팀장 얘기다. 고향은 경남 거제도. 아버지는 외도해상농원(당시 외도자연농원) 시설팀장이었다. 그도 울적해질 때마다 외도에 들어갔다.

거제도 혜성고등학교 졸업 후 외도에 원예담당으로 취직했다. 요즘같은 학력 인플레 시대에 그는 고졸이다. 건강상 이유도 있었고 '대학 원예과보다 현장에 배울 게 더 많다'는 생각도 작용했단다.

고교 졸업 후 딱 한 번 원예 교육을 받아봤다. 1996년말 영국 런던 잉글리쉬 가드너 스쿨에 적을 두고 식물원에 다녔다. 한 식물원에서 원예사가 '삼지단나무'를 소개하면서 멀찌감치 서 있던 강씨를 가리켰다. "너희 나라 나무"란다. 강씨가 알기론 그건 중국 원산의 나무였다. 한참을 서로 고집스럽게 논쟁을 벌였다. 집에 와 도감을 찾아보니 한국 나무가 맞았다. 우리 것도 모르면서 공부하겠다고 영국에 와 있는 게 부끄러워 얼마 후 귀국했다. 98년부터 우리 자생식물을 공부할 겸 한택식물원에 출근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그 후 삼지단나무는 한국.중국에 자생한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 다 맞은 셈이다.

그는 안성에서 출퇴근한다. 오전 7시면 식물원에 나와 있다. 독일에서 종자를 수입하는 등 외국과 거래가 많아 아침에 확인할 이메일이 많아서다. 사무실 업무가 끝난 오전 7시 20분부터 작업차량을 타고 식물원을 한바퀴 돈다. 얼마전 새로 심은 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지도 보고 현장에서 바로 업무를 지시하는 것이다. 식물원은 총 20만평. 만보계를 선물받아 하루 얼마나 걷는지 재본 적이 있었다. 1만 5천보였다.

공기 좋은 식물원에 근무하면서 하루에 1만 5천보를 걸으니 운동도 따로 없고, '웰빙직종'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워커홀릭'이다. 퇴근 후에는 밤새 꿈에서 나무를 심기도 한다.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직원들도 그래요. 참 이뻐요. 꽃 하나 좋아서 여기까지 와서 막노동 하는건데"

이곳을 돌보는 정식직원은 21명이다. 강 팀장은 그 중 13명의 팀원을 거느리고 있다.

차에는 항상 옷가방이 실려있다. 일이 많으면 언제든 밤을 샐 작정에서다. 여름휴가 때는 실습생들을 데리고 외도에 갔단다. 일년에 한 달쯤 아프리카.호주 등지로 해외 출장을 다니다보니 휴가와 출장이 겹친 적도 많다. 그렇게 출장 끝에 호주 온실에 들여놓은 바오밥나무가 자리잡아 싹이 날 때까지 서너달을 꼬박 아침마다 달려가 살피기도 했다.

암벽등반도 배웠다. 취미가 아니다. 벼랑에 꽃나무를 옮겨 심거나 희귀 식물을 벼랑같은 자생지에 복원하기 위해서다. 위험한 일을 '우리 애들'에게 시킬 수 없어 직접 하려고 배웠단다. 그는 부하 직원들도, 식물원의 꽃나무도 '우리 애들'이라고 부른다. 정작 본인은 미혼이다.

늘 걱정스런 것은 병충해. 멀쩡했던 나무가 어느날 보니 벌레가 속을 다 파먹는 일도 있다고.

가장 무서운 건 사람. "봄에 학생들이 단체관람 와서 뛰어다니고 나면 남아나지 않을 때도 있어요."

사람이 무섭다는 그는 되려 자연재해엔 꿈쩍도 안한다. 4년 전 장마철에 수생식물원이 온통 물에 잠겼다. 20년 넘게 사재를 털어 식물원을 가꿔온 이택주(62) 원장마저 이때는 망연자실했다.

"하늘이 하는 일이니 어쩌겠어요. 외도같은 섬도 아니고 육지에서 일어난 재해니 보수도 쉬울 거에요"

30년쯤 나이 어린 강팀장이 오히려 위로했다.

"외도에선 여름마다 세 번씩은 태풍에 나무가 뽑혀 나갔어요. 인간이 아무리 잘나도 자연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걸 체득한 셈이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식물원엔 봄이 왔고, 그도 바빠졌다. 기온이 올라가면 심으려고 겨우내 다양한 수종을 준비해 뒀기 때문이다.

용인=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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