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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원측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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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안시(합서성)에서 종남산에 이르는 장안현의 길 양쪽에는 「포플러」니 거목들이 늘어서 있다. 왼쪽 산복에 있는 화엄사지에는 두순탑과 묘각탑이 높이 솟아있다. 더욱 남쪽에 이르면…현장삼장의 묘탑인 당삼장탑이 있다. 이 탑 양쪽에는 측사탑과 기사탑이 있다. 측사탑은 원측을 위한 곳이다….」
중공 땅을 답사하고 돌아온 일본의 불교학자 겸전무웅박사의 글이다.
신라시대는 명승·고승을 많이 낳았다. 송의 찬령이 쓴 『송고승부』에도 원측을 비롯하여 의상·순륜·도증·신방·대현 등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이 자랑하는 공해 최징 등은 빠져있다. 당시엔 신라인과 중국인과를 따로 구별하지 않은 때문이라지만 어쩌면 신라승이 일본인보다 더 뛰어났다고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입당한 신라승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게 원측이었다. 그는 3세에 출가하여 15세에는 이미 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현장이 서역에서 돌아오자 바로 그에게서 새 유식론을 배웠다.
『송고승전』에서는 원측을 파문당한 이단자취급을 하고 있다. 현장이 자은대사를 위해 『성유식론』을 강의하고 있을 때 원측은 문지기를 매수하여 마루밑에 숨어들어 와서 강의를 듣고, 자은보다 먼저 재빨리 『성유식론소』를 써냈다고도 적혀 있다.
실제로 그의 학덕이 높아감에 따라 그의 명성도 오르고, 이에 따라 비방과 박해도 많이 받았던 게 분명했다.
여기에도 굽히지 않고 원측은 당시의 당의 대역경사업의 도장노릇을 하던 서명사에서 도증을 비롯한 신라의 입당승들을 가르쳤다.
원측은 현장의 수제자였던 자은대사계로부터 눌림을 받아 중원에서는 크게 세력을 펴지 못했지만 멀리 돈욱지방에서는 가장 높이 평가되었던 모양이다.
「티베트어」로 번역된 불서중에 중국인 것은 없어도 원측의 『해심밀경소』가 끼여 있는 것도 이런 때문일 것이다.
원측은 끝내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84세로 죽을 때까지 장안이나 종남산 깊숙이 세운 암자에서 살았다.
『송고승전』에서는 그가 신라의 왕손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권2에 보면 그는 모량의 미천한 출신으로 하여 승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다.
원측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도 혹은 이런데 까닭이 있던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신라의 학자들은 돌아가서 신라불교의 꽃을 만개시켰다.
이제 겸전박사를 통해 처음으로 원측을 기리는 측사탑과 비문을 볼 수 있게 됐다. 그 호의가 몹시 고마운 한편으로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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