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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써 삶과 세계를 투시, 부현종의『마음놓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어려운 때일수록 시인은 시로써 삶을 생각한다. 이 생각함이 때로는 시인들에게 일종의 좋지 않은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절제안 된 직선적인 발언이나 열정으로 시를 가득 채우게 만들기도 한다. 반드시 직선적인 발언과 열정이 나쁜 것은 아니나 문제는 이같은 것들이 시인이 자신의 생을 바라보고 생각하는데 있어 일종의 차페막같은 구실을 한다는데 있다.
반면에 시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되잖은 고답성을 고집하는 지나친 결벽증 역시 차페막 구실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우리 삶의 진실이 그러하듯 시도 언제나 이상과 같은 낡은 상투성이나 기존의 선험적관념을 깨뜨리는데서 참된 자기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얼굴이 시인의 모험을 일깨우는 원동력이며 세계와 생의 새로운 모습이 될 것이다.
이 달에 읽은 정현종의『마음놓고』 (세계의 문학·가을) 는 앞에 적은바 시로써 삶을 생각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아니 우리가 삶과 세계를 어떻게 제대로 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고 그 태도나 방법은 언제나 그렇듯이 정현종 특유의 어법에 의해 잘 뗘받들려져 있다. 우선 이 시를 산문으로 번역해서 읽어보자. 화자 (persona)는 더불어 사는 다른 모든 것들과의 지존관계에 대한 일체의 긴장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와 진공상태가 되도록 놓는다.
곧 모든 기존의 감정이나 생각 이념을 제거한 순수한 마음에 우리가 도달할때 그 기존하는 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삶이나 세계의 다른 일면이 오히려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는 『아』라는 감격과 함께 그 순간을 맞이하며 『모든 마음이 생기는구나』라고 진술한다. 과장하자면 서정시의 가장 원초적인 형식이 영탄하는 순간의 감탄부호 하나라면 그 감탄부호로 파악되는 생의 파편적 순간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할까.
이렇게해서 이 시는 「놓는 줄도 모르게/ 마음놓는」본마음에 이를 때 또는 「사람도 무슨 미덕도 내꺼라고 안 할수 있는」 역동적 고요의 순간에 이를때 우리는 참 사랑과 참미덕도 만나게 됨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마치「마음의 평정」 을 설파하는 채근담의 한귀절을 읽는듯한 단순성과 명쾌함을 보이는 것이다. 정현종의 시는 무슨 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도덕적 발언이나 표정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같은 도덕적 발언이나 표정이 만드는 차페막을 넘어 삶과 세계의 실상을 보려한다. 그리고 이같은 긴장이「큰건 작고」「마음 못놓는 일도/다 마음 놓이는구나」와 같은 일종의 역설어법의 틀을 취하게 만든다.
본 마음을 지니는 일과 비슷하게 떠들면서 구속과 얽매임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박제간의 『초충』 (문예중앙·가을)이 보여준다. 그러나 정현종이 단순성과 명쾌함으로 또 그것을 뼈받드는 역설어법으로 긴장을 촉발한다면 그에비해 박제간의 시적긴장이 많이 풀어진다. 그것은 주로 산문적인 호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헤매임도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라는 귀절이 하나도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것과 같은 정신구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같은 정신구조는 그의 시를 일단 읽히는 것으로도 만들어주는데 그것은 곧 자신이 안고있는 절제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코 어떤 주의나 이념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생과 세계에 대한 화해를 끝까지 유지하는 정신의 유연함이 곧 그것이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이 유연함은 박제천 시의 힘이면서 때로는 큰 아픔을 거느리지 못한 만큼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최애리의『나무 2·3」(뿌리깊은나무· 9) 은 다소 그 분위기가 자기것으로 굳어있지 않은 것이 약점이면서도 감수성이 이같은 약점을 잘 막아주고 있다. 그의 감수성은 이달의 시에서 나무를 통해 세계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일과 그림자의 변화를「리듬」화시켜 표현하는 힘을 보여준다.
곧 앞에 든 두 시인들의 방법적인 노력과는 달리 생과 세계를 보는데 있어 상투형이나 기존의 선험적관념을 제거시켜 새로운 국면을 비춰주는 역할을 이 감수성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새롭지않은 시를 쓰는 시인들을 생각할때 이같은 감수성의 의미가 더 뚜렷해진다.
시인은 이미 삶을 생각하는 방법으로서 시를 선택한 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차이가 있다면 생각의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그것의 형식적 등가물을 통해 드러나는 생자체의 높낮이의 차이가 될 것이다.
홍신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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