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의 상흔은 아직도…광복절이 즐겁지 않은 원폭 피해자|의사 없는 「원폭 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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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광복 34주년-.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곳이 있다. 경남 합천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원폭 피해자들이 몰려 있어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한마을 주민 60%가 원폭 피해자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가하면 군내에만 2천여명의 피해자가 있다. 73년 이곳에 일본 민간 단체가 「속죄의 헌금」을 보내와 우리 나라 유일의 원폭 병원을 세웠으나 의사가 없어 다섯달째 병원 문을 열어놓고도 쉬고 있다. 국내의 2만5천여 원폭 피해자들은 15일 광복절을 맞고도 즐겁지가 않다.

<제구실 못하는 원폭 병원>
합천에 원폭 피해자 진료소가 세워진 것은 73년12월14일.
일본의 민간 단체 「핵 병기 금지 평화 건설 국민회의」가 72년 한국의 원폭 피해자 실태를 조사하고 돌아간 뒤 피해자가 가장 많은 합천에 「속죄의 헌금」 1천5백만 「엔」을 모아 보내 이 진료소의 문을 열었다.
진료소 건설비와 치료 기재는 일본측이 부담하고 병원 운영은 경남도가 맡기고 했다.
80평의 아담한 철근 「콘크리트」 병원 건물이 완공되고 X선 촬영기 등 20여종의 각종 의료 기재가 들어와 74년1월4일 정식으로 문을 열어 합천 뿐만 아니라 전국의 원폭 피해자들에게 무료 진료가 실시됐다. 그동안 연평균 3천여명의 원폭 피해자를 치료, 지금까지 연인원 2만여명이 혜택을 보았다.
육체적 고통과 함께 생활고에 시달리던 원폭 피해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지난 3월말 6년 동안 진료를 맡아 봤던 진료소장 정모씨 (39·합천 보건소장 겸직)가 일신장의 이유로 그만둠으로써 「의사 없는 병원」이 되고 말았다.
하루에도 전국 각지에서 30여명의 원폭 환자들이 찾아오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일이 다섯달째 계속되고 있다.
『전문의를 모셔오자면 최소한 월 1백만원을 안주고 되겠읍니까. 이런 벽지에 월급도 적은데 누가 오겠습니까』 원폭 피해자이면서 8년째 사재를 털어 원폭 피해자 구호 운동을 펴고 있는 정기장씨 (58·합천읍)의 말이다.
올해 진료소 예산은 국비 1천1백89만원 등 1천8백59만2천원. 간호원 4명·병리기사·X선 기사·기관공·운전기사의 인건비와 약품비 등등 빼고 나면 전문의사를 초빙할 예산이 없다.
군 당국자도 예산 부족으로 병원 운영이 어렵다면서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합천군은 임시로 수련의 파견을 도에 요청해 지난달 15일 1명이 배치됐으나 보건소와 원폭 진료소일을 함께 보는데다 원자병에 대한 전문의가 아니어서 제대로 진료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폭 피해자 마을>
경남 합천군 합천면 내곡리. 해발 3백m가 넘는 고지대에 합천 이씨 일족 6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평화스런 산촌이다.
그러나 이 마을 주민 4백여명의 60%가 원폭 피해자이거나 그 가족 또는 2세들. 해방을 맞아 고향을 찾았으나 이들은 아직도 원폭에 의한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이 집단으로 원폭 피해를 본 것은 대부분 해방전 일본 「히로시마」에 거주했기 때문.
해방 전 「히로시마」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고향을 물을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히로시마」에 거주했던 한국인 8만여명 가운데 8할 이상이 합천 출신이었기 때문.
1920년대 생활고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히로시마」에 정착한 이곳 출신들이 연줄로 가족·친지들을 불러들여 집단으로 이주했다.
불행하게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지점에서 1·5∼2km 반경 안인 중강정·천만정·횡천정 등에 40여 가구 2백여명의 합천읍 내곡리 사람들이 모여 살았었다.
당시 한국인의 피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5만여명이 사망하고 5만여명이 피해를 본 것으로 한국 원폭 피해자 협회 (회장 서석우)는 추산했다.
내곡리 안분임 할머니 (66)는 「히로시마」에서 일가족이 원폭 피해를 당했다. 남편은 해방 이듬해 귀국해서 사망하고 당시 5살이던 딸은 평생 불구가 돼버렸다.
안 할머니의 딸 이재임씨 (39)는 원폭 투하로 무너진 집에서 혼자 5시간을 헤매다 온몸에 방사선을 쬐어 걸을 수도 없는 불구가 됐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주름살만 뻗쳤다.
이 마을 주민 가운데 중환자들은 귀국 후 1, 2년 사이에 사망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개 경증환자들.
증상도 갖가지다. 이 마을 이만환씨 (68)는 「류머티즈」로 고생하고 있고 김기련씨 (57·여)는 고혈압과 원인 모를 요통을 앓고 있으며 이갑순씨 (56)는 만성 빈혈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
원폭 피해자 협회 합천 지부장인 이 마을 이상이씨 (59)는 지난 6월 우리 나라를 방문한 일본 자민당 간부들이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도일 치료를 주선하기로 약속했다는 보도에 마을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다면서 『일본 정부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게 보상해줄 책임이 있다』고 했다. <합천=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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