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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자개세계 가져야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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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여성유권자연맹(회장 김정례)이 주최한「새로운 시대의 여성상 모색을 위한 공청회」가 4일 저녁 서울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최근 몇 달 동안 여성계의「이슈」로 제기되었던『중년여성의 문제』를 놓고 그동안 이대학생들과 서울대·고대·중앙대·한양대·이대 등의 여성 교수들, 각 여성단체 의원들을 중심으로 넓게 퍼졌던 논쟁을 집약하여 처음으로 열린 이 공개토론회에는 그간의 열기를 반영하듯 남녀대학생과 각계 여성 2백여 명이 참가,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하오10시까지 계속됐다.
오늘의 한국여성이 어떤 위치에 와 있으며「가정」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여성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이 벌어진 이 공청회는『남자는 비록 잘못해도 여자만은 그래선 안 된다는 식의 전근대적이고 권력 지배적인 모순에 가득 찬 여성관과, 유한층의 일부여성을 마치 전 한국의 중년여성인양 지칭하면서 지금 숱하게 고생하고 있는 근로여성·농촌여성의 다수를 짓밟는 그릇된 논리를 벗어나 오늘의 여성은 새 시대를 향해 삶의 주인으로서 선택적 생활로 나가는데 투쟁해야한다』(이효재 교수의 결론)고 뜻을 모았다.
『젊은 여성의 입장에서』(김경애·이대 여성학 조교),『중년여성으로서』(정숙자·주부),『중년남성의 입장에서』(김쾌상·중앙신학교 강사),『사회학적 분석』(이효재·이대 사회학 교수)등 4명의 발제강연과 참석자들의 공개질문으로 진행된 토론회에서 특히 참석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40대 가정주부 정숙자씨의『중년여성으로서 내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정씨는 결혼생활 18년, 4남매의 어머니로 남편과 원만한 가정을 꾸미고있는 주부인데 자원봉사의 사회활동을 하며,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베다니」평신도교육원장이기도 하다.
내가 약혼식을 끝냈을 때 남편은 나에게『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사랑이란 희생입니다』내가 대답했다. 이 말이 그렇게 내 인생을 뒤바꾸어 놓을 줄은 나는 그때 알지 못했었다.
나는 결혼하고 이 말을 실천하기에 모든 삶을 바쳤다. 남편「밑에서」희생으로만 살아왔다. 이대 김옥길 총장이 언젠가『한국의 현모양처란 부모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상실한 여성』이라고 풀이했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완전한 현모 양처였다.
남편의 발도 씻어주고 양말도 신겨 주었다. 남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 내 자신이 남편 속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결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솔직이 내 인생은 그것으로 실패였다.
결혼생활5년이 지나 아이가 셋이 되고 부터 내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있다보니까 집안이 항상 시끄럽고 깨끗이 할 수가 없어졌다. 안락한 보금자리로 남편을 의해 깨끗하게 해놓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집안을 잘못 다스리오? 공밥 먹고 집안일 하나도 못해?』남편이 역정을 버럭 냈다.「공밥」이란 말이 내 머리를 쳤다. 왜 내가 공밥인가? 이렇게 피곤하게 시달리는데도 공밥이란 말인가? 그럼 나도 공밥 아닌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겹쳐 남편도 가끔 예사로 외박도하고 집에 들어오면 나하고는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일체 바깥 얘기는 하지 않았다.「라디오」·TV·신문 읽기 아니면 잠자는 일밖엔 집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 남편은 자기세계가 있구나, 그런데 나는 무언가? 고작 내 사고래야 혹시 남편이 바람
이나 피우지 않을까 하는 데만 집중한 것. 정말 갑자기 나의 한계를 느꼈고 나도 딴 세계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이었다. 그 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일이다. 화투 치고 술 마시고 투기에 몰려다니는 내 또래 부인들을 동정할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반발이 절실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바보가 됐다는 후회가 자꾸 깊어가면서 내 마음 속에서의 갈등이 5년 간 계속됐다.
그럴 무렵, 75년「세계여성의 해」를 맞았고 나는 내 갈등을 용감하게 타개해야겠다는 용기를 여기에서 얻었다. 마침 남편이 미국에 가서 1년 간 공부하겠다고 하기에 나도 한번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었다. 75년부터 1년 간 한국신학대학 선교대학원에 들어갔다. 내가 처녀시절 공부했던 신학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공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YWCA에 나가 자원봉사대로 여러 가지 일, 소위 바깥일도 열심히 했다. 나로서의 보람된 내 세계를 가져야한다는 내 결심의 실천이다.
지금 나는 집안살림도하면서 바깥일도 하고있다. 그리고 내생각도 많이 바뀌어졌다.「부부」라는 것은 예전엔 여자가 남자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남녀 절반 절반씩 모여 합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서로에게 부당함을 주지 않는 진정한 화목의 가정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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