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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흩어진 후에도 달은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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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연수
소설가

빛과 어둠의 문턱을 넘어서면 갑작스레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 천마총에 들어간다는 것은 내게 그 공기를 맛본다는 뜻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의 일이니까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오래전에 죽은 왕들의 봉긋한 무덤 사이로 구불구불 늘어진 대기 줄을 한참 따라간 뒤에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 전 영화 ‘경주’에서 찻집 주인 역의 신민아가 능 위에 배를 깔고 누워 두 손을 모아 “안에 들어가도 돼요?”라고 묻는 장면을 보는데, 그 시절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나는 그 안에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낯선 여행으로 좀 지쳤고, 줄 서서 기다리느라 좀 지루했고, 햇살을 피할 수 없어 좀 더웠다. 그래서인지 무덤 속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꽤 좋았다. 벽을 따라 걸어가면서 나는 왕관이며 허리띠, 혹은 천마도 등을 구경했다. 그런 부장품은 고스란히 남았는데, 정작 왕의 몸만 사라졌다니 기분이 묘했다.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라는,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구가 떠오르는 풍경이었달까.

 그 느낌 역시 축축하고 서늘한 것이었다. ‘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 있나요?’라고, 쉼보르스카는 같은 시 ‘박물관’에 썼다. 인간의 몸과 그에 딸린 감정이란 잠시 동안의 것들이다. 전사의 분노를, 미녀의 미소를, 왕의 고뇌를 전시하는 박물관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몸이란 아무리 길어야 100년쯤 일렁이다가 절로 사그라지는 불꽃 같은 것이고, 제아무리 격렬한 것이든 그 몸에 딸린 감정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작 100년만 지나도 오늘의 희로애락을 증언할 입술은 이 땅에 하나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 몸을 사랑한다. 사기조각보다도 더 쉽게 사라지는 것이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의 몸을 가장 사랑한다. 황금 보관을 준다고 해서 자기 몸을 버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덤에다 대고 “안에 들어가도 돼요?”라고 묻는 장면이 애잔하게 느껴진 건 그 때문이다. 그건 마치 “나는 내 몸을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에. 신민아 같은 미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애잔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쩌다 보니 지난 20년 동안 소설을 쓰게 됐다. 처음에는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글쓰기는 열병 같은 것이었고, 무조건 쓰는 증상으로만 그 병을 진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몇 권의 소설을 펴낸 뒤, 나는 십대에 접했던 어떤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그토록 많은 글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성만씨의 죽음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몸을, 그것도 절망에 빠져서가 아니라 어떤 희망을 향해 던진다는 게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20년 동안 소설을 쓴 뒤에 나는 타인의 죽음을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고 또 물어도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건 그 누구도 타인의 죽음은커녕 손톱 밑에 파고든 가시만큼의 고통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는 진실뿐이다. 타인의 고통과 그의 죽음은 그토록 견고한 것이라 결코 이해되지 않은 채로 우리 마음속에 영영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괴로운 일이리라. 누군가의,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만 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이 삶이 계속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오랜만에 경주 대릉원을 찾아 왕릉의 부드러운 선과 민가의 낮은 지붕들이 서로 잇대어 하늘과 맞닿은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고도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그린 풍경화 같았다. 영화 ‘경주’에는 찻집 주인의 남편이 죽기 전에 벽에 걸어놓은 그림 한 점이 나온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사람들은 결국 흩어질 뿐이니 삶도 사랑도 덧없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초승달은 어김없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 몸에 불과하지만, 달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거기에도 있다. 오늘 다시 그 달이 새롭게 눈을 뜬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럼에도 계속되는 우리의 삶처럼.

김연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