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10만 학도병, 보훈단체 인정도 못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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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8월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학도군 현충비에 모인 학도의용군과 김석원 장군(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사진=학도의용군 6·25참전기념사업회]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가자! 김석원 장군의 휘하로!”

 뙤약볕이 내리쬐던 1950년 7월 25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십만의 피란민으로 인산인해였던 대구역 한 켠에는 이런 격문이 붙였다. 격문 앞에는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정신없이 내려왔던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렇게 모인 80여 명은 대구역 앞 동아빌딩 2층에 마련된 학도의용대 임시사무소를 찾아갔다. 6·25라는 누란지위의 위기에서 대한민국 사수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학도병은 이렇게 탄생했다. 사기는 높았지만 제대로 된 무기도 훈련도 없었다. 김만규 학도의용군 6·25 참전기념사업회 회장은 “일주일 후에야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구식 소총과 개인당 50발의 실탄이 지급됐다”고 말했다.

 시작하자마자 시련을 겪었다. 50년 8월 11일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하는 국군의 퇴로를 엄호하기 위해 포항여중에서 진을 치고 11시간 넘게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87명 중 48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는 2010년 권상우·최승현 등 톱스타들이 출연한 영화 ‘포화 속으로’의 배경이 됐다. 포항전투는 후퇴 시간을 확보한 국군이 주요 전력을 재정비하고 향후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57년 정부는 이를 기념해 ‘포항지구 전적비’를 세웠다. 전적비 앞에는 학도병과 국군이 어깨동무 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7월 31일 경북 안동에서 국군 1군단 후퇴 엄호작전을 시작으로 38선 북진·원산 전투 등 51년 3월 6일 해산할 때까지 6·25전쟁의 주요 무대에서 활약했다. 포항전투의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학도병이 결성됐다. 3년 동안 10여만 명이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6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 억울하다고 말한다. 보훈처가 학도병 단체를 보훈단체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군 자료라든지 공식적인 공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식 보훈단체가 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에 생존한 학도병은 2000여 명. 학도의용군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어린 나이에 잔혹한 경험을 해서 그런지 학업 중퇴자가 많다. 학도병 출신 대부분 사회생활에 실패하고 어렵게 살아간다”며 정부와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일본에서 건너온 재일 학도의용군=학도병은 일본에서도 건너왔다. 6·25 발발 후 일본 전역에서 1000여 명이 자원해 이 중 642명을 추려 의용대를 구성해 참전했다. 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재외 이스라엘 학생들이 자진 입대한 것보다 17년 앞선 시점이다. 재일 학도의용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비롯해 각종 전투에 참가해 135명이 전사했다. 이들은 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본 정부가 입국을 거부해 귀국하지 못하다가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야 일부가 돌아갔다.

 가족과 영영 이별한 비극적인 사례도 있다. 김운태(86)옹은 빠듯한 생활 등으로 끝내 입국을 못 하다가 가족과 연락이 두절되고 지난해 60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 개인정보 보호 이유로 자료 열람을 거부해 가족들을 찾지 못했다. 재일 학도의용군은 현재 국내 25명, 일본 12명 등 37명이 생존해 있다.

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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