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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월드컵] 배신 당한 '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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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첫 골을 허용한 뒤 한국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한국은 23일 열린 알제리전에서 총체적 문제를 드러내며 2-4로 패했다. 전반 26분 이슬람 슬리마니가 선제골을 넣고 있다. [포르투 알레그리 로이터=뉴스1]
박주영(왼쪽)이 후반 12분 교체 아웃된 뒤 홍명보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 [포르투 알레그리=뉴시스]

2014년 6월 23일은 한국 축구사에 치욕의 날로 남게 됐다.

 홍명보(45)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이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열린 브라질 월드컵 H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알제리에 2-4로 완패했다. 한국은 전반 12개의 슈팅을 허용하며 3골을 내주는 동안 한 개의 슈팅도 기록하지 못했다. 영국 BBC는 한국의 전반 경기력에 대해 “월드컵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혹평했다.

 알제리전 참패는 홍 감독의 전략·전술·선수 기용 등 총체적인 판단 미스의 결과다. 특히 박주영(29·아스널), 정성룡(29·수원), 윤석영(24·퀸스파크레인저스) 등 경기력 논란에도 불구하고 베스트11에 기용돼 ‘대표팀 의리 논란’의 중심에 선 선수들이 부진했다.

 ◆바뀌지 않는 얼굴들=변화에 인색했던 팀 운영은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홍 감독은 2년 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따낼 당시의 팀 운영 방법을 A대표팀에서 재활용하고 있다. 최종 엔트리 23명 중 절반이 넘는 12명이 런던 멤버다. 포메이션도 4-2-3-1 그대로다.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게 큰 문제다. 알제리는 1차전 선발 라인업에서 무려 5명을 교체해 한국전에 나섰다. 반면 홍 감독은 러시아전 베스트11을 그대로 가동했다. 월드컵 개막 전 열렸던 튀니지(5월 28일), 가나(6월 10일)전 멤버와 비교해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알제리는 이미 한국의 패를 훤히 읽고 있었다.

 ◆러시아전에만 올인=선수들이 참여한 알제리 전력 분석 미팅이 경기 사흘 전에야 처음 열렸다. 러시아와 조별리그 첫 경기에 ‘올인’하느라 그랬다지만 이해하기 힘들다. 4년 전 남아공 월드컵 때는 그리스와 1차전에 역량을 집중하면서도 아르헨티나(2차전), 나이지리아(3차전) 전력 분석도 병행했다. 3개국 자료가 담긴 동영상을 휴게실에 비치해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비디오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홍명보호 선수들은 알제리 축구에 적응할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바히드 할릴호지치(62) 알제리 감독이 “여러 달 동안 선수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한국 축구를 철저히 분석해 승리의 해법을 찾았다”고 밝힌 것과 뚜렷이 대조된다. 조별리그 최종전 상대인 벨기에의 전력 분석 미팅도 23일에야 시작한다.

 ◆“23명 모두가 리더”=그라운드의 구심점이 없다는 건 여러 차례 지적받았다. 알제리전에서 한국은 전반 26분 이슬람 슬리마니(26·스포르팅)에게 첫 골을 내준 것을 시작으로 12분 동안 3실점했다. 흔들리는 수비진을 다잡을 베테랑이 없었다. 그라운드 안에서 동료를 독려하는 선수가 안 보였다. 홍 감독은 “1명의 리더보다 23명 모두가 리더가 되길 원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리더는 없었다. 코칭스태프의 위기대응 능력도 모자랐다. 한국은 전반 초반부터 알제리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선수들은 자리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벤치에서 구체적인 사인이 나갔어야 했는데 그런 모습은 없었다. 세 번째 골을 내준 뒤 홍 감독은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예방접종 후유증=선수들의 컨디션 관리가 제대로 됐는지도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홍 감독은 월드컵을 앞두고 체력 훈련에 많은 공을 들였다. 상대보다 한 발 더 뛰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1차전부터 엇나갔다. 한국 선수들은 러시아전에서 총 108.129㎞를 뛰었다. 러시아(113.809㎞)보다 5.68㎞나 덜 뛰었다. 후반 30분 이후 러시아가 체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한국 선수가 3명이나 쥐가 나 쓰러졌다. 2차전에서도 한국(112.902㎞)은 알제리(113.819㎞)보다 적게 뛰었다.

 선수들은 1차 전훈지였던 미국 마이애미로 출국하기 전날인 5월 29일 단체로 풍토병인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았다. 황열병 예방접종 후 3∼5일 사이에 두통과 고열에 시달릴 수 있기에 보통은 최소 출국 열흘 전에 맞는다. 선수들은 원래 주사를 안 맞으려다가 국제축구연맹(FIFA)과 축구협회 의무분과위원회가 재차 권유하자 부랴부랴 출국 전날 예방접종을 했다. 이 때문에 마이애미 전훈 초반 일부 선수는 감기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6월 5일 하루, 예정에 없던 휴식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마이애미에서 계획했던 체력 프로그램을 다 소화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넘어오는 바람에 선수들 컨디션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축구팬들은 16강 진출과 상관없이 벨기에와의 예선 최종전에서 한국 축구의 매운맛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홍 감독도 “전체 결과는 내 실책 때문이다”라며 “선수들을 안정시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홍 감독 자신부터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포르투 알레그리=송지훈 기자, 윤태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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