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옛날 이발소, 장인의 '가위손' 은 쉬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12일 서울 만리동 성우이용원에서 3대째 가업을 잇는 이남열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를 감기고 있다. 연탄으로 데운 물을 찬물과 섞어 비누로 감긴다. 1960년대 만든 세면대가 눈에 띈다. [강정현 기자]

87년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의 최고(最古) 이발소 ‘성우이용원’은 1927년 서울 만리동 고개의 왼쪽 골목 꼭대기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고개 건너편은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골목은 굴착기에 무너져 흙더미로 변했다. 이발소 자리도 수년 내에는 고층 아파트 차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삼대(三代)째 가업을 잇는 이발사 이남열(65)씨는 재개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무슨 소리야. 절대로 이 땅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성 고객들을 미용실로 대거 빼앗기면서 전국의 이발소는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80년대 여성 면도사가 이발소로 들어오면서 퇴폐 영업으로 방향을 튼 곳도 있다. 풍파 속에서도 한길을 걸어온 성우이용원. 서서히 불어오는 재개발 바람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이웃 상인들은 “저 집은 정치인이나 대기업 사장들도 잊지 않고 온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12일 오후 성우이용원에는 남성 고객 둘이 차례를 기다렸다. “이거 안 벗어도 돼요?” 처음 온 젊은 남성에게 이씨는 셔츠를 모두 벗도록 능숙하게 유도했다. 한 시간 남짓 이발이 끝나면 남성들은 몸을 뒤로 젖혀 턱을 맡겼다. 면도날이 살갗을 긁어대는 소리가 사각거린다. 혜화동에서 온 박정선(39)씨는 ‘면도의 시원함’에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만원짜리 석 장을 건넸다. 하루에 고객 열 명 이상이 찾는다고 한다.

낡디 낡은 간판 앞에 선 이남열 이발사. 강풍에 글자가 벗겨졌지만 그대로 두고 있다. [강정현 기자]

 재개발로 동네 단골은 줄었지만 발길을끊지 않는 정·재계 인사들 덕분에 이곳은 아직 건재하다. 이씨는 정직한 기술만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기업 임원들은 빈틈없이 깎아야 한다. 점잖게, 무게 있게 세 번만 잘 깎아 단골로 잡아 놓으면 다른 데 절대로 못 간다”고 했다.

 기술의 기본은 연장을 가는 데부터 시작된다. 인적이 드문 일요일 새벽 성우이용원 창 너머로 칼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씨는 “날 가는 날은 하늘이 정한다. 사람을 보면 기가 빠지기 때문에 번잡한 날은 피한다. 날이 숫돌에 착 달라붙는 순간을 잡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서랍장에는 50년 된 숫돌이, 손가방에는 100년 된 면도날이 비닐봉지와 신문지에 꼭꼭 싸여 있다. 이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만든 무쇠 칼로 면도를 하면 미세한 상처조차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흰색 반창고가 감긴 그의 손끝도 날렵했다. 그는 “면도는 (얼굴 피부를 만지는) 왼손의 작품이다. 오른손은 잡아줄 뿐이다. 면도날 무게로 수염이 절로 깎이게 해야 한다”고 했다. 행여 손이 흔들릴까봐 술은 40년 전에, 담배는 16년 전에 끊었다.

 세심한 서비스도 단골을 잡아 두는 비결이다. 무더운 여름에는 고객 다리 밑으로 선풍기를 놔주고, 머리카락이 날리지 않게 그 위를 하얀 천으로 덮어 빨래집게로 고정한다. 머릿속 피부염을 없애주기 위해 헹구는 물에 식초를 푼다. 의료법이 강화되기 전에는 면도칼로 종기와 사마귀까지 빼줬다.

 서른여덟에 늦장가를 든 이씨에게 스물여섯 된 아들이 있다. 아들은 이발과 상관없는 일을 하지만 서른을 넘어서면 아버지가 하는 일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그는 기대하고 있다. 말투마저 장인(匠人) 같은 그의 이발소가 또 다른 반세기를 넘을 수 있을까.

글=김민상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