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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여행들의 추억|김원룡<서울대교수·고고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난 한해동안 기뻤던 일과 괴로왔던 일이 뭐냐고 일본의 어느 교포신문이 물어온다. 글쎄 신문에까지 돌고 나갈 수 있는 희비사가 뭣이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런 일들이란 모두 개인의 비밀이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정말인 것이다. 사람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중생활 하는 위선자들 이어서 바탕은 모두 똑같은「인간」이요 정말 희비사는 남에게 말못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신문에 쓰는 자서전 같은 것 읽어보면 자기의 거죽만을 손질하고 과장해서 모두가 항일투사요 애국자요 입지전중의 인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옇든 나 자신이 남에게 말할 수 있는 지난 한해동안의 기뻤던 일들은 무엇일까. 생각나는 것은 몇 개의 조그만 여행밖에 없다.
11월11일에는 강릉으로 갔다. 강원대학의 고분발굴을 보러갔는데 대관령고개를 넘어서니까 안개낀 꼴짜기 마다 감나무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에 붉은 감이 수백개씩 달려있는 것이다. 마당에 저런 나무를 심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즐거울까. 너무나 아름다와서 강릉 「터미널」에서 감 달린 가지를 한아름 사 가지고 돌아와 집에, 연구실에 매달고 그림을 그려서 친구에게 보냈다. 연구실은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감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11월19일에는 친구와 함께 자동차로 가평에 갔다. 건국대학교에서 하는 이곡리 유적발굴을 구경하고 그 길로 명지산 대원사로 갔다. 일에 밀려서 일요일도 놀지 못하는 내가 처음으로 일요일 하루를 부담 없이 야외에서 보낸 것이다. 집도 없고 사람도 없는 산길이, 맑은 내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간다. 늦가을의 산에는 유현과 창고의 신비가 있다. 넓은 내를 건너서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일직선으로 올라간다. 거기에 대원사가 있다. 집 두채 뿐인 조그만 암자에는 늦가을의 찬바람이 스칠 뿐 아무데도 인기척이 없다.
돌계단을 어린애처럼 뛰어 내려와 맑은 냇물로 밥을 지었다. 그리고 밥이 되는 동안 돌을 찾으며 돌을 던지며 하얀 돌밭을 걷는다. 물에 씻긴 태고의 냇돌들은 모두 아름답다. 이런 대자연의 앞에서는 인간의 무력과 허무를 새삼스러이 느끼게된다. 자연은 위대하다.
12월3일에는 경주 서쪽의 주사산 위 산성으로 올라갔다. 고 신라시대의 광막한 산성 안에는 갈대밭 속에 고분들이 흩어지고 몇 채의 민가와 높은 바위 옆에 조그만 절이 있다. 멀리 올라온 이 옛 성터에는 20세기의 그림자 하나 없고 신라의 산천이 천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꼭 청전의 그림에 나올 듯 한 초라한 산가에서 점심을 먹는다. 술도 한잔 들어본다. 모두 맛있다. 나흘 뒤가 대설이라는데 이 산가 풍지문 햇살은 봄날처럼 밝고 따스하다.
12월22일에는 의령의 충익사에 갔다가 삼천포로 나와서 우리 나라서 제일 싱싱한 생선회를 먹인다는 「미지횟집」에 들렀다. 바다 바로 옆의 조그만 집이고 생선은 바다에 잠겨둔 통에서 꺼내온다. 산 생선이니 싱싱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귀로는 진주로 나와 산청·거창을 거쳐 옛 국도를 따라 김천으로 올라갔다.
이 국도 변의 경치도 아름답다. 시간만 있으면 자며 자며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한해가 저물 무렵이 되면 모든 일을 집어치우고 어디론지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 혼자서 차를 타고 뒷길로 뒷길로 옛길을 따라 어디 조용한 산기슭이나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싶다. 벼루와 붓도 가지고 산과 나무와 바위를 그리며 낯선 곳을 찾아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꿈이고 한해는 석화처럼 지나가 버린다.
인생의 한계가 보이는 마당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뭘 한일이 있을까. 조그만 여행들의 추억만이 남으면서 올해도 지나가 버린다. 새해도 또 그럴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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