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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중국사서보고 한국사 쓸 수 있나…|「국사 찾기 협의회」의 반론에 붙여 이용범<동국대교수·동양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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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어느 민족이나 그들의 역사를 엮는데 있어서 외국인의 기록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아무리 정확을 기한다 하더라도 외국인의 관찰은 그 대상으로 하는 민족 속에 깊이 간직된 사상이나 감정까지는 밝혀내기가 어려운 피상적인 관찰에 그치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시 관찰자의 무식이나 판단능력의 결여라든가, 우월감에서의 멸친 또는 어떤 정략적 의도를 가지고 관찰한 결과를 문서로 남긴 경우에는 그 문서를 가지고 역사를 엮어야 하는 민족사에는 언제나 안개에 싸인 것 같은 불투명한 점과 개운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에서 외국인의 기록이 지닌 이용의 한계점을 독설한 사학자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의 고대사는 거의가 중국의 사서에 의존해 엮어져 나가고 있다. 일찍부터 한민족과의 접촉이 같았으나 스스로의 문자를 가지지 못했으며 한자로 쓰여진「유기」「신서」등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나 김부식의「삼국사기」의 저 본이 되었다는「구삼국사」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상고시대에 관해서는 사기·막기·삼국지 등 중국정사에 보이는 단편적 기록이나 우리민족에 대한 전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이와 같은 정사에도 완벽한 것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가장 잘된 사학의 명저로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마천의「사기」조차 어떤 제도나 정책결정의 과정에 대한 기사는 그 공을 어떤 특정인 한사람에게만 틀리는 경향이 있어 사학자에게 적지 않은 신경을 쓰게 하고 있다. 하물며「사기」이외의 각 정사는 모두 적지 않은 오류와 모순된 기사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래도 정사의 경우는 설사 오류나 모순이 있다 하더라도 밝혀내기 쉬우나 그 밖의 고적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다루기가 힘들며 모험을 무릅쓰고 이용하는 수가 많다.
그 가장 심한 것이 지금 항간에서 일부인사들이 그 지론을 뒷받침하는 자들로서 금과옥조같이 떠받치고 있는「산해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거에는 여러 판본이 유통되었으나 현존하는18권 본에서 전국시대 이전의 것은「오장산경」5권뿐이며「해외경」4권, 「해내경」4권은 전한 말인 서기전 1세기말에 유수에 의해 첨가되었고「대황경」4권과 제18권에 있는 또 하나의「해내경」1권은 서기3세기에서 4세기초의 곽박이 주를 붙일 때 첨가한 것이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익이 우의 치수에 종사하며 엮었다고 하는 그 성립부터가 신비적 요소에 싸인「산해경」은 실로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엮어졌으며 사기·천서·삼국지 등 한국고대사의 체계구성에는 기본 사료가 되어있는 정사보다 늦게 첨가된 것도 있으나 이와 같은 그 찬성경위보다 더 괴이한 것은 이 서적의 성격과 그 기사내용에 있는 것이다.
즉 한서예문지에서「산해경」은 술수의「형법 가」로 분류되고 있다. 「형법」은 인상과 풍수지리에 관한 서적을 말한다. 「산해경」의 기사가 후세에는 미신적인 위서에 적지 않게 전기되었던 것도 당연하거니와 청대의 사고전서에서는 잡설를 긁어모았다는 의미에서 이를「소설가」로 분류하고 있다.
이제 그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오장산경」중에는 이보·기금·괴곤 들이 백출하여 사마천도『「산해경」에 보이는 모든 괴물은 믿지 앉겠다』는 불신을 표현한바 있으나 이것은 전한 말에 엮어진「해외경」「해내경」도 마찬가지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 보이는 지명·산천·소택 명은 지금의 지명에 맞추어 보면 맞는 것은 1백에 2∼3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자·착간도 많다는 것이 전문가의 일치된 견해다. 「수경」에 주를 붙인 여도 원이나「산해경」에 주를 붙인 완원의 노력에도 지리연구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게 조선에 관한 기사를 예로 들어보면「해내배경」에 『조선은 열양 동에 있으며 해북·산남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하고 제18권의「해내경」에는『동해의 내, 북해의 끝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극히 모호한 기사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바다」(해) 또는「배해」는 발해만을 가리킨 것이며 어느 분의 주장같이 「북해」를「블라디보스톡」으로 비정하여 단군 조선의 영토로 비약시켜 단정하는 것은 억지다.
「산해경」의 성격으로 보아서 있었다고 하면 으례 적혀 있어야할 단군 설화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산해경」의 단편적이고 모호한 기사를 곧 단군 조선의 영토와 결부시키는 것부터가 역사학의 기초훈련만 제대로 밟았다면 상상조차 못할 언어도단이다.
육간여·추덕곤·하차군·소천구치 등「산해경」에 관한 연구가들의 상세한 연구성과를 읽어도「산해경」은 이해하기 어려워 사학연구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만주원류고」도 마찬가지다.
건강제의 명을 받들어 아계 등 고관이 주동이 되어 편찬한 이「만주원류고」는 문학전통이 없는 소수의 만주족이 높은 문화전통을 가지고 중화 족의 우월감을 가진 다수의 한민족을 통치하는데서 느끼는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 차있는 서적인 것이다.
전20권 중에서 학문적으로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것은 제18권 풍속·어언에 보이는 만주어가 비교 어언 학의 자료가 될 뿐이며 그 나머지의 인용서적은 모두 현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적을 나열하고 거기에 만주족에 유리한 해설을 붙인 것이다.
특히 옥저·예·신라·고구려·백제에 관한 중국 측 자료를 모아서 만주족의 역사에 넣고있는 것은 한국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를 전개시키지 못했고 만주사의 일부분으로의 한국사를 가졌을 뿐이라는 일본 관학자의 이른바「만선사관」이라는 식민지 사관의 합리화에는 편리할 뿐이다.
「만주원류고」가 의도하는 바는 만주족 정권으로 보아서는 만주의 중심부까지 신라의 영토라는 설명을 붙었더라도 자족 내에 전개된 부족간의 성쇠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만주원류고」에서 신라의 영토를 길림과 개원 일대까지로 추단한 근거가 매우 박약한 것이었다.
즉 그 논거라는 것이 송의 선화6년(1023)에 사신으로 송화강 지류유역인 금의 회령부까지 갔던 허항종의 여행기에서 제29정에 보이는 감주(현개원)부근에서 바라보는「신라산」의 산명과 신당서에 보이는 신라의 구주 명이었다.
신라의 구주 명을 중국정사 중에서는 가장 오류가 많은 것으로 악평이나 있는「요사」에서, 그것도 특히 착오 투성인 지리지 같은데서 동명의 주명을 골라 실은「만주원류고」의 견해는 오늘날 우리 나라 사회 계의 수준으로 보아 전혀 추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삼국사기」의 편찬 자 김혈식은 지금 우리 나라에서 사대주의자니 또는「사적」이라고까지 매도대어 있으나 그도 한국인이 틀림없으며 그것도 신나게 사람이었다. 신라사에 유리한 자료가 있었다면 고의로 없애버릴 인물이 결코 아니었던 것은「삼국사기」의 신라기를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엮어진 정사조차 믿지 않고 중국서적의 단편적 기사를 깊이 검토도 않은 채 그대로 믿는 것이 과연 주체적인 학적자세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하물며 역사학을 정치의 시녀로 밖에 보지 않은 북한의 역사서적까지 들먹여 그 지론을 합리화하여 우리 학계나 국민에게 추종을 바라는 일이 만의 하나라도 있다면 그 해독은 매우 클 것 같다.
『같은 우물의 물을 먹고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는 법 구경의 말과 같이 중국사서는 그 이용방법 여하에 따라 우리 역사연구에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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