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적은 동지? … 미국·이란, 이라크 반군 협공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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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ISIL 소속 반군들이 14일 자신들이 점령한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에서 사로잡은 정부군 병사들에게 사복을 입히고 엎드리게 한 채 압송하고 있다. [AP=뉴시스]

내전으로 치달은 이라크 사태로 오랜 앙숙인 미국과 이란이 손을 잡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바그다드를 향해 진격하는 이라크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를 저지해야 하는 공동 목표 때문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워싱턴과 테헤란이 같은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양국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공공의 적은 테러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누구도 이라크에 테러리스트가 발 붙이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튿날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도 “우리는 테러 집단과 맞서야 한다”며 “이라크의 요청이 오면 돕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미국이 테러 집단과 싸우기 시작하면 협력을 생각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면 미국이라도 돕겠다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양국의 복잡한 속내와 이해관계도 협력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미국은 사태 해결을 위한 군사 개입을 고려하면서도 신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직접적인 군사 개입 자제를 골자로 한 신(新) 외교정책을 발표한 지 보름여 만에 다시 중동의 화약고에 빠져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ISIL을 막기 위해 모든 옵션을 고려하고 있다”면서도 “지상군 투입은 않겠다”고 못박았다.

 이란 역시 테러와의 전쟁 명분 뒤에 수니파 대 시아파 종파 대결이라는 진짜 이유를 두고 있다. 이라크는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이 물러나고 시아파인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집권하면서 이란과 가까워졌다. 현재 양국의 친밀도는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라크는 이란의 꼭두각시”라고 할 정도다. 결국 수니파인 ISIL이 들고 일어난 것도, 이란이 이라크 정부를 보호하는 것도 종교 때문이다. 시아파 맹주인 이란은 미국과 손을 잡고라도 종파 다툼에서 이기고 기득권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미 미국·이란의 협공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이 무인기(드론)를 투입해 공중에서 ISIL를 타격하고, 지상에선 이란의 혁명수비대가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ISIL을 저지한다는 가설이다.

 한편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14일 아라비아해 북부에 있던 항공모함 조지HW부시함을 걸프만으로 이동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사일 순양함 필리핀시함과 미사일 구축함 트럭스턴함이 함께 이동한다. 조지HW부시함에는 6000여 명의 병력이 승선해 있다. 전투기와 헬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도 탑재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 언론은 시리아 사태 당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아 여론의 비판에 시달린 만큼 이라크 상황이 악화될 경우 오바마 대통령은 공습 명령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그러나 양국이 협력하기엔 불신의 골이 깊다는 지적도 있다. 시리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이란은 미국의 골치다. 이런 이란이 이라크의 알말리키 정권에 지나치게 가까운 것도 미국으로선 못마땅하다. 미국으로선 이란을 견제해도 부족할 판에 아예 개입할 여지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이란 핵 협상에서 양국이 이라크 사태를 논의할 거란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서울=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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