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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한·일 채널, 외교 장관부터 뚫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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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일러스트=강일구]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짙푸른 녹음이 고즈넉한 대구 남동쪽 삼정산 기슭. 이곳엔 일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있다. 귀화 일본인 장수 사야카(沙也可)를 모신 녹동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병사 3000명을 이끌고 온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투항한다. 그러곤 조선 편에 서서 싸운다.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도 늙은 어머니를 업고 뛰는 농부를 보곤 “이런 군자의 나라는 짓밟을 수 없다”며 마음을 돌렸다는 거다. 조선인으로 변신한 사야카는 숱한 공을 세운다.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조선에 전수해 왜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이 덕에 선조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란 이름을 하사받는다. 임란 후 활약도 대단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병자호란 때는 청군 500명을 벴다.

 이 사연이 일본 NHK에 방영되면서 사야카는 일약 유명인으로 떠올랐다. 잘못된 침략전쟁엔 반대한 의인 이미지에다 조선을 위해 싸운 점도 부각되면서 한·일 화합의 상징으로도 대접받고 있다.

  이런 녹동서원에 지난 2일 자민당의 거물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중의원과 그가 이끌고 온 정치인·예술인 등 일본인 30여 명이 찾아와 참배했다. 니카이 의원은 한·일 우호에 앞장 서온 인물이다. 야스쿠니 참배 시비를 없애기 위해 별도의 추모시설을 만들자고 제안할 정도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은 반드시 화합해야 할 이웃”이라며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말뿐이 아니었다. 방한 기간 중 한국 측 인사들과도 만나 해결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최근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녹이기 위한 일본 측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달 중 자민당 의원 5명이 방한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도 지난달 말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회장을 만나 “정상회담을 위해 모든 수단을 써달라”고 당부했다는 소식이다.

  한·일 전문가 사이에선 “이렇게 가면 모두에게 득 될 게 없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다. 특히 시간은 결코 한국 편이 아니다. 우선 위안부 할머니들이 속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 지난 8일에도 배춘희 할머니가 타계했다. 위안부 문제가 타결돼도 혜택 받아야 할 희생자들이 사라질 판이다. 한·일 관계 악화에 따른 불이익도 눈덩이처럼 불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직후인 2012년 가을 한국의 한 소주업체는 도쿄의 유명 백화점에서 “물건을 빼라”는 통보를 받았다. “물건 회전이 잘 안 된다”는 게 표면상 이유였지만 직감적으로 한·일 관계 때문임이 느껴졌다는 게 관계자의 증언이다. 그 후 ‘한국산 소주는 마시지 말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판매는 계속 떨어졌다. 대표적 한류 제품인 막걸리·김치·김 등의 일본 내 소비도 폭락했다.

끝으로 지금 이대로라면 일본의 일방적 대북 정책을 막지 못한다. 납북 일본인 피해자 문제와 관련한 북·일 관계 개선은 결과적으로 한국에 득이 될 순 있다. 하나 한·미와의 조율 없이 일본 멋대로 대북 문제를 처리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일본이 화해의 손을 내밀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 측에서 보면 먼저 불을 지른 건 일본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다 고노 담화 검증 등 화를 돋울 만한 악재가 숱했다. 이 때문에 적절한 조치와 사과가 없는 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덥석 손을 잡을 순 없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 입장에선 운신의 폭이 극히 좁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화답할 수 있도록 일본 쪽에서 명분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옛날엔 한·일 양쪽의 막후 거물들이 막힌 혈맥을 뚫어줬다. 하나 아쉽게도 이들은 타계했거나 예전 같은 힘은 잃었다. 결국 남는 현실적 타개책은 양국 외교관들이 물밑에서 뛰는 거다. 외교 채널을 통해 아베 정권을 설득하고 한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카드가 뭔지를 서로 논의해 결정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대사 간 핵심 채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1년3개월이 지났는데도 행사장에서 잠깐씩 만나는 것 외엔 두 사람 간의 개별 면담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대사관 측은 “윤 장관이 만나주지 않는다”고 불편한 기색이다. 외교부 측에선 “지난해 4월 면담이 잡혀 있었는데 이틀 전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갑자기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바람에 취소됐다”며 “그 후에 일본 쪽에서 만나자는 얘기가 없어 성사되지 않은 것뿐”이라고 해명한다.

  이유야 어쨌든 윤 장관-벳쇼 대사 간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전직 외교부 장관 등 적잖은 원로들이 “일단 만나보라”고 권하는데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늘 강조하는 게 있다. “분쟁은 대립이 아닌 외교적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한다”고.

 지난해 윤 장관은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전 외무상을 만나 이렇게 당부했다. “정치력을 발휘해 한·일 관계가 안정될 수 있게 노력해 달라”고. 모든 채널이 꽉 막혀 답답한 형국이다. 정치력이든 외교력이든, 외교 총수부터 융통성을 발휘할 때가 아닐까.

남정호 국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