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중문화는 흐른다 비꼬이는 언어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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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건국 30년에 가장 크게 변한 것 중의 하나는 인간관계다. 일제 때까지도 수직적 종속관계에 묶여있던 사회윤리가 자유평등에 바탕을 둔 수평적 관계로 변했다. 사회생활에서도 경어가 점점 사라진다. 『아빠, 과자 사줘!』다. 성년이 된 자녀가 「어머니」대신 「엄마」로 부르고, 반말을 예사로 쓰게됐다.

<점점 사라지는 경어>
여기에다 6·25를 겪으면서, 인구이동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방언의 경계가 희박해지고 14도의 욕설이 혼합되면서 다잡해진 언어는 저열·저질로 치닫게 됐다고 김봉군 교수(성심여대·국문학)는 지적한다. 생활감정이 격화되고 세태가 각박해지면서 경음·격음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조건」은 「조건」이 되고 「헌법」은 「헌뻡」으로 굳어져간다. 품위를 잃고 점점 거칠어져 간다. 「축인다」도 모자라서 「쭉인다」로 변하고 「소주」는「쐬주」다.
모든 생활이 가속화되면서 생소한 약어를 남발한다. 「경제원칙」이 언어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불고기백반은 「불백」이고, 곰탕을 보통으로 시키면 「곰보」, 갈비탕 보통이면 「갈보」를 먹어야 한다. 언어의 「인플레」현상까지 빚는다. 「굉장히」라는 웅장한 말이 어떤 말 앞에서도 버젓이 버티고 선다. 「굉장히 아름답다」는 예사롭게 쓰여지고 이젠 「굉장히 맛이 없다」「굉장히 작다」는 말까지 생겼다. 그러자니 자연히 불신 받는 말을 불신에서 구제하기 위해 지저분한 수식어가 붙어댄다. 얼마 전 서울 남대문시장에는 「정말 순 진짜 참기름 팝니다」라는 헝겊에 쓴 선전문이 서 있었다.
「웃긴다」·「삼삼하다」·「피본다」가 생활용어로 굳어져 간다. 이같은 언어의 저속화현상을 대중문화의 바탕이 형성되기도 전에 「매스·미디어」가 급격히 늘어난 데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이대규씨(한국교육개발원)는 발표의 기회는 늘었지만 평소에 자신의 사고과정을 정리해서 말에 질서를 세우는 훈련을 사람들이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저질언어가 양산된다고 본다. 사고의 바탕 위에 세련된 표현을 하겠다는 노력은 없이 진실성을 못 가지는 대신 억지로 웃기기만 하고 끝내려는 경향이 언어를 비꼬이게만 한다는 것이다.

<영어 써야 잘 팔려>
이러한 현상은 대학생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정범 교수(경희대·국어학)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 5년 동안 대학생들이 즐겨 사용하는 은어는 87개에서 4백여개로 늘어났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사회적 규범을 살짝 비켜가는 재치 넘치는 은어가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고 체념하는 은어까지 나온다. 경직된 사회구조를 비판하면서 『오는 말이 거칠어야 가는 말이 곱다』고 하고, 『남아일언 풍선껌』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할머니와 손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가장 많은 시간 가정을 지키는 두 주인공은 대화가 되지 않아 서로가 외롭다. 할머니에게 「××바」를 사달라고 손자가 조른다. 여러 가지 「아이스크림」중에서도 「××바」가 구미에 꼭 맞았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그 괴상한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그것이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도 할머니에게는 벅차다. 그래서 비슷한 걸 사다주었더니 손자는 고마워하기는커녕 「할머니는 바보」라는 투정을 했다.
덕수상고 우리말 지켜쓰기 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과자·빵·껌 종류는 99%가 외국어 상표를 붙여놓았다. 할머니가 일일이 기억 못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사람의 생명에 직접 관계되는 약품명에서도 외국어가 판치기는 마찬가지다. 1천여종 중, 4%만이 우리말로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고 한다. 어떤 농부가 농약을 잘못 알고 마셨다가 생명을 잃고 주의사항을 지키지 못해 약화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같은 회사의 같은 제품이라도 『우리말 상표를 쓰면 매상이 훨씬 떨어지고 영어로 상표를 붙여놓으면 훨씬 많이 팔린다』는 과자회사 영업담당자의 현실 진단에 바탕을 이루는 사회풍조가 문제다.
얼마전 고교생들이 서울시내의 관청·은행·회사·다방 등을 돌며 흔히 쓰이는 외래어의 뜻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조사한 일이 있다.
답을 써준 1천22명 중 「레저·붐」은 79%, 「맨션·아파트」90%, 「리사이틀」78%, 열차 「다이어」51%, 독자「가이드」60%, 「센터」79%, 「다큐멘터리」는 56%가 뜻을 잘못 알거나 엉뚱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생활주변에서 흔히 쓰이는 이같은 말만 가지고도 우리의 언어생활은 극도의 혼란상태를 빚고 있다고 말한다. 「레저·붐」의 뜻을 모르고 쓰는 사람이 68%, 「놀자판 유행」정도로 잘못 알고 쓰는 사람이 11%다.

<「마담」씨 「백」가방>
다방에 가방을 맡겼던 중년신사가 『「마담」씨, 「백」가방』이라고 외치며, 달걀 달라는 손님의 주문은 『「에그」요?』하고 확인 않는 다방「레지」가 없을 정도다. 첩을 「세컨드」 라고 부르는 국적불명의 영어도 나온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말이 죽어간다. 「노트」에 눌려 공책이 죽고, 달력이 「캘린더」에, 암시가「힌트」에, 그리고 성이 「섹스」에 눌러 빈사상태에 와 있다고 김원경 교수(서울교대) 는 지적한다.
사회는 어떻든 언어라는 약속을 통해 하나의 동질집단을 형성한다. 서로가 같은 말을 쓰면서 뜻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계층마다 다른 말이 점점 많아져 간다는 것은 자칫 계층간의 갈등이나 괴리현상을 빚기 쉽고, 공동체라는 사회의식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데 주의해야겠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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