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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30년 특별「시리즈」(8) 한국속의 미국 안방에 파고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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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7월 어느 백화점이 미국산 수입과자류를 내놓자 2천만원 어치가 1주일만에 매진돼버렸다. 국산보다 3배나 비싼 값이었다. 미국「거버」사의 유아이유식품이 판매대에 오르고선 국산이유식은 5분의1로 매상이 뚝 떨어졌다.
『이른바 「화이트·칼러」(지식층 봉급생활자)의 대부분은 전기제품에서 기호품에 이르기까지 미제를 쓰고 있을 겁니다.』장문소씨(36·동산토건)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외국물건을 쓰지 않는 축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상한 말…「한제」>
너도나도『질 좋고 믿을 수 있고 값도 싸다』는 구실로 외제를 찾는다. 손님이 오면 미제「코피」나「주스」를 대접해야 체면이 서고 양주 몇 병쯤 하다못해 빈병이라도 장식장 위에 놓여있으면 더욱 자랑스럽다. 외국제를 쓰면 사회적 위신이 높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기저귀에서 화장지까지 미군PX유출물건은 단순한 소모품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다 보니 국산은「한제」로 제3국 제품처럼 불린다.
소비자의 65.6%가 외국상품의 사용이『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인 조사(한국생산성본부) 가 실감나는 이야기다.

<미국방송이 좋아>
하지만 외제사용이 꼭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암매상이건 소비자건 다른 사람 눈에 뜨일까봐 감추느라 애를 쓴다.「쓸만한」국산품을 두고 외래품을 쓴다는 게 사회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외래품을 쓰고 난 소비자중 34.4%가『부끄럽다』의 반응을 보인 조사(한국생산성본부)가 이를 말해준다.
『요새 젊은 사람 중 국내 TV「프로」를 보는 사람이 누가 있읍니까』「스포츠」중계만 빼놓고는 미군의 AFKN방송에만「채널」을 맞춘다는 신령균씨(27·상업·용산구이태원동)의 주장이다. 화면만 보아도 폭력물「드라머」는 박진감이 있고「쇼·프로」는 아찔하고 화려해서 좋단다. 신문을 받아들면 미군「텔리비전」의「프로그램」안내에 좋은 영화가 없나 훓어 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주로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월간 팝송』지의 방송청취율 조사는 매달 1천여통의 엽서중 80%가 AFKN청취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녀에게 영어교육을 일찍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어느 대학교수는 AFKN의 어린이 시간이면 아이들을 붙잡아 앉힌다. 국민학교 다니는 두 아이는 3년전부터 영어과외수업을 받고있다.
반포「아파트」안의 어느 가정집에는 토요일 하오 3시면 조무래기들 20여명이 모여든다. 『하우·아·유?』인사를 나눈 다음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영어노래의 가사내용에 따라 몸짓을 하며 유희를 벌인다.

<하우·아·유?>
『외국어습득을 통해 국제간의 우의를 다지는』이「라보. 클럽」은 서울에만 70여개소, 인천·안양 등지로 확산중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애국가 가사를 맞춤법에 맞도록 쓰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어떤 연구보고서는 밝히는가 하면 7개 국어국문학 단체에서는 국어교육 시간이 너무 짧으니『초·중학교 국어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문교부에 건의하고 있다.

<상호 80% 영어표기>
『미국 의학석사×××』라는 서울을지로의 어느 병원간판이 돋보이던 10년전 서울시내 개 이름의 90%는 외국사람 이름이었다.
『명동에 가면 세계일주를 할 수 있다』는 농담이 그대로 통용될 만큼 외국식 상호가 너절하다. 76년4월 박대통령이『간판·방송용어에 외국어가 과다하고 어린이가 먹는 과자이름 중에 90%가 영어라는 말을 들었다』고 국어순화운동을 촉구할 때 서울시내 술집·다방의 77%가 외국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다소 규제가 되기는 했으나 지금도 명동일대 양장·양화·양복점등 3백8개업소중 60%인 1백87개소가 외국식 이름이다. 여기에 억지 조어법으로 미국식 냄새를 풍기려「국산화」한 상호까지 덧붙인다면 80%가 넘는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서울시내 외래어간판 실태를 조사하여 발표하고는 우리말 찾기 운동을 벌이며 거리로 나오기까지 했다.
『외래어가 범람하고 뜻도 모를 얄궂은 단어로 표시된 상점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린애들의 장난감에까지 대부분 영문자로 표기 된데 놀랐다』고 세살짜리 딸에게 줄 장난감을 사러갔던 최광준씨(경기도 김포군)가 덕지덕지 붙은 영어를 보고 두달전 신문독자 투고난(중앙일보)에서 한탄했다.

<지식층의 열등감이>
하기야 정부에서 만든「태양」담뱃갑의 8면 중 6면이 영자로 표기되어「선」이라 부르고 공공기관인 은행이 지점 이전광고에『78·7·18 OPENING』(7월17일 조흥은행)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상인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그래서 내집마련 보다는「마이·홈」, 상여금보다는「보너스」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생활화」된 영어를 풀이해주기 위해선지 『백과사전을 겸할 수 있도록 편찬됐다』는 국어사전마다「굿·모닝」에서「스테이츠먼」(정치가)이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영어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미국바람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무방비상태로 지내왔다. 미국바람은 한국사람들, 특히 도시의 지식층을 문학적인 열등감과 『미국 것은 최고』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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