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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마지막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정치생활을 하려면 「스태미너」와 결단력이 있어야 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아내 「패트」는 정치생활에는 무엇보다도 애정(heart)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내의 이 말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고독한 백악관>
「패트」는 참으로 다감했다. 백악관 생활에서 「패트」의 마음가짐은 천혜의 선물이었다. 백악관 구석구석에 「패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딸들도 자상하고 너그러운 어머니의 성품을 물려받았다.
백악관의 첫 1년은 고독감과 개인생활 상실 속에서 지냈는데 이는 우리가 예기치 못했던 일이다. 무척 당황했다.
대통령직이 일반 시민 생활에서 얼마나 고립된 것인지 이때야 알게 됐다.
가족과 나는 가능한한 행복하고 자유롭게 함께 시간을 보낼 여유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줄곧 딸들의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젊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살 자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밤낮으로 나의 싸움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깊은 사려는 큰 위안이었다. 「줄리」는 가끔 신약성서를 내 침대 곁에 펼쳐 놓아두었는데 위로의 문구를 담은 것들이었다. 「트리셔」는 내가 가장 우울할 때 집무실로 찾아와서 내가 책을 읽거나 일을 하는 동안 곁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사랑과 지원의 조용한 봉사였다.
큰딸 「트리셔」는 남편 「콕스」의 변호사일 관계로 「뉴욕」에 살았기 때문에 「워싱턴」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줄리」와 「데이비드」부부는 나의 대통령직 마지막해 내내 「워터게이트」사건의 소용돌이 속을 직접 헤쳐 나갔다. 「워싱턴」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찰거머리 같은 언론의 감시망과 시시각각 가중되던 탄핵 위협의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내 「패트」는 언제나 우리 가족 가운데 가장 강인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때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했다.

<「패트」는 사교적>
「패트」는 또 자상하고 우아하며 사람을 사귀는데 남달리 천재적이었던 재질을 가졌던 탓으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나는 미국 정치사상 그런 면에서는 「패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제럴드·포드」대통령이 말했던 것처럼 내 아내는 정말로 『세계의 「퍼스트·레이디」』그대로였다.
이러한 우리 가정에 「워터게이트」사건은 고된 시련이었다. 그러나 내 가족은 이 시련 속에서도 항상 서로간의 애정을 소중히 간직했다.
74년8월2일 하오 「헤이그」백악관 수석보좌관이 하원의 탄핵 결의와 상원에서의 통과 전망이 이제 더 이상 의심할 바가 없게 됐다고 보고했을 때 그날 우리 가정의 모습을 「트리셔」의 일기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아침 일찍 「줄리」가 전화를 해 왔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아빠가 「줄리」에게 사임할 듯이 이야기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나는 허둥지둥 백악관에 달려왔다.
「줄리」의 말을 듣고 나는 엄마가 아빠의 결정을 모르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엄마를 보호하고 싶었고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빠는 늘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보호하려했다.

<온 가족 기념촬영>
아빠는 「링컨·룸」의 갈색 안락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빨고 있다가 『언제 왔냐』면서 반겼다. 그리곤 아빠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가 나라를 위해서 사임한다는 이야기를 하려할 때 나라를 위해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빠를 얼싸안고 이마에 「키스」를 했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아빠는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백악관의 마지막 날밤 모두가 일광욕실에 모였다.
「패트」는 「소파」의 끝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긴장한 모습이 평소보다 꼿꼿이 쳐든 머리에서도 나타났다. 내가 걸어 들어갔을 때 아내는 나에게 다가와 얼싸안고 「키스」했다. 아내는 『우리 모두 아빠, 당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트리셔」는 「에드」와 팔을 끼고 앉아 있었고 「줄리」는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데이비드」는 「줄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처럼 훌륭한 가정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뒷날 우리는 이날 밤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나는 「패트」에게 마지막 사진을 찍게 「로즈·가든」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요구였던 것 같았다. 「트리셔」는 『내가 함께 갈께요, 아빠』하고 말했다.
우리가 「로즈·가든」에 들어갔을 때 「트리셔」는 3년전 거기서 결혼했을 때처럼 내 팔을 잡았다.
아무도 「포즈」 잡는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트리셔」는 71년 「블루·룸」의 「크리스머스·트리」 앞에서 찍은 우리가 좋아하는 가족 사진에서처럼 한 줄로 팔을 끼자고 했다.
사진을 찍기도 전에 「줄리」는 눈물을 흘렸다. 오늘밤 우리가 취할 태도는 태연함을 보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애써 활기 찾으며>
나는 일일이 가족들의 자리를 지적해 주었으며 사진사는 잽싸게 사진을 찍었다.
백악관에서의 마지막 만찬이라 식욕이 있을리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 접시들을 일광욕실로 가져오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거기에 함께 있었고 서로 밀착해 있었다. 그것은 내 생애의 가장 값진 순간의 하나였다.
우리는 활기 있게 이야기하려 애썼으며 개들이 먹이를 달라고 재롱떠는 것을 보고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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