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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저력 뭉클한 인간 교향악"|TV「드라마」『뿌리』가 준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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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TBC-TV는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TV영화『뿌리』를 지난 3월25일∼4월1일까지 8일간 장장 12시간의「필름」을 방영했다. 소설을 읽을 때보다「드라마」가 준 감동은 더 크고 절박했으며 그 점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각성케 한 점을 정리해본다.

<『메이플라워호』와『노예선』의 철학>"남이 인간이 아닐 땐 나도 인간이 아니다"|백색 미국문화서 흑색·황색문화도 수용하는 계기로|「인간적인 것」의 회복 외쳐
「앨릭스·헤일리」의『뿌리』를 읽고 또 TV「필름」을 보는 동안 나의 인간적인 뿌리는 사정없이 요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상념뿐만 아니라,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조차 파천 황의 지진이었다.
「미케네」와 그 문화를 휩쓸어 버린 해일처럼. 『뿌리』는 인간에 관한 나의 생각을 뒤죽박죽으로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분노·공포·수치·연민·전율….온갖 감정과 정서의 재고가 끓고 부글대고, 그리고 풍비박산되었다. 그것은 꼭「킨타·쿤테」가 실려오던 노예선의 밑창 같았다.
하지만 이때 기이한 연상이 일어났다. 내 감정과 청서의 난항은 얘기하지 않아도 좋다. 노예선 속의 수난의 장면에 저「메이플라워」가 겪은 시련의「신」이 겹치는 것이었다.
검은 수난과 흰 시련이 겹쳐져 그것들이 다시 험한 파도를 헤치며「아메리카」로「아메리카」로 가고 있는 영상 없이, 나는 더 이상『뿌리』를 읽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플리머드」해안, 「메이플라워」에서 내린 첫 이민들이 밟았다는 작은 바위울타리 속에 잘 보관된 그 한 개의「바위」가 피부 빛이 흰 사람들에게 끼쳤을 의의와「헤일리」의『뿌리』가 검은 빛깔의 사람들에게 주었을 의의가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짓밟은 자들의 발에 어울리는「바위」와 짓밟혀 땅에 꺼져 버린 자들의 존재에 어울릴『뿌리』의 차이인 것일까.
하지만 이제 계속해서 혼란을 얘기하고, 난항을 주워 섬기고, 차이를 얘기할 때는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떳떳하게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제 갈 갈무리된 질서 있는 생각을 꾸려야하고 인간이기에 서로 함께 탈 수 있고 더불어 떠날 수 있는 항해를 위한 해도를 마련해야 한다.
『뿌리』를 캐는 손길에 의해서 두개의 인문수치가 노정 되었다. 인간적인 것을 범한 짐승스런 자들의 수치와 인간적인 것을 유린당한 서러운 목숨들의 수치다. 남을 인간 이하로 학대함으로써 스스로 짐승으로 전락한자들의 수치와, 인문이하로 학대받음으로써 동물로 전락한자들의 수치다.
이 두개의 수치끼리가 그 피 어린 눈들을 맞대고 만난 자리가 바로『뿌리』다. 이제 두개의 수치는 서로를 까놓고, 끼리끼리 터놓고 그 수치들을 청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킨타·쿤테」의 후예가 캐낸『뿌리』는 옛날을 추적하거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뿌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것을 향해 뻗은 뿌리다.
합인 종국이기도 한 미국이 내건「멜팅포트」의 이상은 필경「인디언」과 흑인, 그 밖의 소수약 소 민족을 제외·말소함으로써 이룩된 백인문학의 융합에 불과함이 드러났을 때, 미국은 새로이「비욘드·멜팅포트」를 내걸었었다.
소수약 소 민족의 독자성을 지키자는 것이 이「주해의 피안」이다. 모처럼의 합 종국을 참답게 합 종국이게 하자는 자비이다. 「헤일리」의『뿌리』가 이 융해의 피안에 이를 다리 구실을 할 것은 믿어도 좋다. 이리하여 흑인·「인디언」, 그리고 황색 이민이 떳떳한 부수의 빛깔이자 얼굴이 되게 다짐하는 뿌리 노릇도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흑인을 물량 화하고 생산단위 화하였다가, 이제는 자신들마저 그 지경에 전락시킴으로써 현대적「휴머니즘」의 위기에 불지른 백인중심의 미국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참답게 인간적인 것의『뿌리』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까만 빛의 「뿌리」를 통해 흰빛의 뿌리가 그들의 인간다움과 모든 현대인의 인간다움을 향해서도 내리게 될 것을 믿고 싶다.

<흑인의「드라마」아닌 인류의「드라마」>2백년을 투시한 구성의 묘|4악장의 교향곡처럼 도입 초의「테마」줄기차게 추적|한국의「드라마」도 대담하게「안방」떠났으면
「앨릭스·헤일리」원작의 TV영화『뿌리』는 종래 보지 못하던 충격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꼈겠지만 절박함·대담함, 그리고 그「스케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과거 흑인의 수난을 다분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 저항이 아니라 민족적 긍지와 맥을 전편에 깔면서 뚜렷한 주제를 교향악적 수법으로 엮어낸 것은 이「드라마」를 성공시킨 열쇠가 될 것 같다.
미국에서『뿌리』가 몰고 온 선풍은 그것이「텔레비전」으로 극화되어 1977년1월23일(일요일)밤부터 8일간 ABC-TV에 의해 방영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장장12시간으로 이룩된 이「드라마」가 방영되던 때의 여러 가지「에피소드」는 각색된 이「텔레비전·드라마」가 원작 못지 않게 주제가 되고 미국인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드라마」는 갈등이 있어야 한다면 흑백문제는 인간의 영원한 갈등의 좋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생명력이 갖는 끈질긴 힘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흑백간의 문제가 아닌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문제점을 보여주어 방관자격인 우리 황색인종에게도 공감을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175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2백년간 9대에 절친 인문 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9대란 핍박받던 인간의 역사를 통해 밖으로는 백인과의 투쟁, 그리고 안으로는 사랑과 자녀들을 키우고 위로는 선조 들을 승상하며 출생과 결혼과 사망이 점철되는 인간사의 끈질긴 생명「드라마」다.
마치 장중한 4악장의 교향악을 연상시키는 구성으로 도입 초의「테마」가 자유를 찾아갈 때까지의 대단원을 향해 줄기차게 축을 이루며 때로는 저항, 때로는 타협, 거기에 사랑과 생존의 몸부림이 섞이며 변주되는 것이다.
6백만「달러」가 투입된 제작비는 이「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를 넓게 잡아 시원한 야외 장「아프리카」에서, 해양, 그리고 미국, 남북전쟁 등 다양하게 보여주며 넓은 공간을 포괄하였다. 시간과 공간에 있어 일 찌기 다른 TV「드라마」가 따르지 못한다.
4명의 연출가에 의하여 연출솜씨가 회마다 다른 것이 특징이었다. 처음의 1편과 2편이 박력 있었고 중간은 약간 처지지만 9편과 10편에 이르러「키지」와「조지」의 대결에서 다시 주제가 반복되는 듯한 강한 힘을 보여주기 위에서 말한 교향악적 구성의 묘를 살리고 있다.
이「드라마」가 성공한 것은 원작의 힘이 우선 큰 것이지만「드라마」의 수법 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대담한 생략과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주제를 통해 무리 없이 연결시킨 것은 탁월한 각색이다.
TBC-TV를 통해『뿌리』의 상영을 보면서 우리 나라 TV「드라마」도 달라져야겠다고 느꼈다.
첫째 안방에서 맴도는 고부간의 갈등에 초점을 둔 연속극에서는 그만 벗어나야겠다는 점이다.
우리의 연속극도 분량 상으론『뿌리』에 비등한 대하「드라마」인데 안방이라는 좁은 공간과 고부사이의 사소한 문제로는 공감의 폭이 크고 절실할 수가 없다. 우리의 폭넓은 역사를 통하여 절감된 인간생활과 인간의 숨결을 부각시키는 인간「드라마」가 나와야 할 것이다.
둘째는 수법상의 대담성이다. 기술과 제작비, 그리고 연기력이 부족한게 사실인데 이런 어려움을 우리 나름으로 극복하는 길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특히 흑인들의 강렬하고 절실한 연기는 우리가 배워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는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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