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제자 발화성>|<제58화>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8)|박화성|문학의 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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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무리 나 혼자 앙앙 불락 해본들 현재에 엄청나게 뒤져 있으니 그의 지도를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천질이 시인이라서 그런지 시의 작법이나 해설에 있어서는 어린애라도 깨우칠 만큼 명료하고 철저하였다.
푸른 별처럼 봄에는 가지마다에서 푸른 싹이 빛나던 은행나무가 음력5월 단오절에는 무성한 그늘을 만들고 그 든든한 가지에 그네 줄이 매어졌다.
운 씨는 나더러 남녀 학생들이나 교원들이나 아낙네들이나 아무라도 그네를 뛰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어 보라고 하여서『무궁화 동산에서 우리 자라고』라는 창가의 곡에 맞추어 두 귀절의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는 삽시간에 각과에서 연습되어 전교생이 애창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운 씨가 흰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대며 그네를 뛸 때나, 내가 그네에 오르게 되면(우리는 다 그네선수였다) 학생들은 더욱 신나고 흥겹게 합창하여서 운동장이 떠나갈 듯 하였고 교무실과 교실의 유리창마다에서 내다보던 선생님과 학생들은 박수로 응원하였다.
가을이면 황금빛 은행잎이 소나기인 양 쏟아지는 황혼의 운동장을 조운과 함께 나와 갈대꽃과 들국화가 양쪽 언덕에 휘늘어져 있는 사잇길을(돌아오는 길이 같은 방향이었다) 천천히 걸어나오면서 끝없는 담화로 이상과 공상의 나래를 펼쳤고 겨울이면 눈이 발목까지 덮이도록 쌓인 눈길을 걸으며 눈의 낭만을 예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어머니를 모셔다가 조촐한 모녀의 살림을 꾸몄던 집 화단에 학생들이 모종해 심은 온갖 화초가 만발한 늦여름 밤에 풀벌레 즉즉대고 달빛에 꽃그림자가 산산하게 흔들리는 뜰에서 인생과 문학을 토론하기에 곁에 계신 어머니에게서 싸우지 말라는 경고를 몇번씩 듣기도 하였다.
15, 16세 때 그렇게도 남성을 기피하던 내가 내 문학의 온상이며 요람이었던 영광읍에서 이성을 초월한 지기의 벗을 몇 사람이나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 주위를 둘러싼 선생들의 전부가 남성인데다가 여자부 심상과 4학년을 빼고는 모두가 까까중머리의 남학생들뿐이며 더구나 70여명의 중학생들과 대결하는 동안은 연중 중성적으로 전환한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오직 하나인 이 처녀교사는 전교의 인기를 독차지했고 누구 나의 사랑을 받았다. 지금이야 남녀공학인 대학교에 여자교수가 드물지 않고 새파란 젊은 여성들이 중-고교의 교유가 흔하지만 50여 년 전인 1923년에야 가물에 콩 나듯이 희한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원장을 비롯한 교감과 그 쟁쟁한 교유들과 교원들과 직원들이 모두가 크나큰 교무실 하나만을 사용하니 어쩌면 나는 교무실의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모두들의 뜻이 서로 통하고 합하여 교무실의 분위기는 언제나 화락 하였는데 격심한 연령의 차이에도 관계없이 잘 어울려진다고 모두를 대견해 하였다.
우리는 자주 사적인 회합을 가졌고 문예좌담의 만찬회도 하였고 서로 서로의 초대향연도 베풀어졌는데 어느 좌석에든지 홍일점의 어린 여교사가 끼어도 어색함이 없었던 것은 철이 덜 들었거나 무엇인가를 초월하는 요소가 내게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행나무에서 그네 줄이 걷혀지고 황금색 은행잎이 비처럼 흩뿌리는 늦가을도 지나 여윈 가지에 달이 걸린 초겨울 밤에 우리는 숙직실에 모여 학부형이자 옛날 가야금의 국수였던 노인을 청하였다.
원장이 석학이면서도 풍류 인이어서 고전음악에 취미가 있는데다가 교원 전부가 다 한마음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까닭에 가끔씩 이런 모임을 가졌다.
창밖에는 서릿 달이 외로이 떠 있는데 애절하게 울리는 선율에 취하여 번개처럼 줄 위에서 넘노는 그의 손길을 바라보며 혼연일체가 되어 넋을 잃고 앉아 있던 그 모습들은 영원히 내 망막에서 사라지지 않는 승화된 인간상들이 아닐 수 없다.
원만하고「유머」가 풍부한 교감은『어쩌다가 여선생까지 이렇게 청승맞은 처녀가 굴러 왔더 람!』하고 뺨이라도 만져 줄 듯이(사실 나는 그의 딸 또래다)들여다보면 원장선생은,『거 무슨 말씀이오니까? 굴러 오다니 요? 모셔 오느라고 우리모두 얼마나 땀을 흘렸는데요』하고 빙그레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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