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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월드컵의 함성, 그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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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승부 조작은 위험한 유혹이다. 승부 조작꾼은 선수들이 약해진 때를 포착해 접근한다. [사진 다람]

THE FIX 승부 조작의 진실
데클란 힐 지음
이원채 옮김, 다람
431쪽, 1만7000원

흔히 축구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부른다. 그런데 당신 기억 속 감동적인 축구 경기들이 조작됐다면? 킥오프 전부터 이미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각본 있는 드라마’라면? 이 위험한 질문이 『THE FIX 승부 조작의 진실』의 뼈대다. 저자 데클란 힐은 이라크·코소보 등 국제 분쟁을 취재해 온 종군기자이자 탐사 보도 전문가다. 스포츠 승부 조작에 대한 연구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승부 조작, 불법 베팅, 월드컵의 불편한 진실 등 축구계 어두운 면을 고발했다. 축구판 위키리크스, 이른바 ‘사커리크스’다. 저자는 수년 동안 승부 조작을 파헤쳤다. 아시아 중소리그부터 유럽 최고 리그까지 훑었고, 아프리카 작은 마을의 유소년 선수부터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까지 만났다. 범죄조직과 승부 조작꾼들, 승부 조작 가담 선수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도 했다. 이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받기도 한 저자는 “책 출판 후 모든 조사 자료를 두 나라에 있는 두 명의 변호사에게 따로 맡겼다. 혹시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모든 자료를 공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에서도 승부 조작이 벌어졌다고 확신한다. 2006년 독일월드컵 16강전 가나-브라질전을 지목했다. 저자는 “경기 이틀 전 승부 조작꾼으로부터 ‘내 친구가 경기 조작에 관여했다. 100% 가나가 최소 두 골 차 이상으로 패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가나가 유소년 축구교실에서도 보기 힘든 허무한 골을 내주고 0-3으로 져 승부 조작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고 폭로했다. 아울러 승부 조작꾼이 밝힌 우크라이나-이탈리아전(우크라이나 0-3패) 등 2006 월드컵 4경기 승패가 적중했고, 3경기는 점수 차까지 맞췄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선수들이 생각보다 쉽게 승부 조작 마수에 걸리고, 승부 조작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치밀한지 알려준다. “일주일에 5만 파운드(약 8750만원)를 받는 선수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선수한테 90분 동안 협조 대가로 15만 파운드(약 2억6250만원)를 제시한다. 선수가 거절할 것 같나”, “승부 조작꾼들은 사람이 가장 힘들어 할 때를 포착해 접근해 온다. 선수들은 승부 조작꾼을 가장 의지할 만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된다. 코치보다도 신뢰하게 된다.” 승부 조작 세계에 발을 담근 사람들의 말이다.

 이 책은 출간 후 CNN, BBC 등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21개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 축구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1998년 월드컵 프랑스의 우승멤버 엠마뉴엘 프티는 “이 이야기는 국제축구의 심장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과 악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고 평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어쩌면 다시는 축구를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불신과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아프리카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축구, 이 스포츠의 본질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눈앞의 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바로잡는 노력이다.

박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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