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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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여송연(시가)과 V자와 미소는 「처칠」수상의 「이미지·마크」였다. 2차 세계대전의 초연 속에서도, 의회에서의 격렬한 토론을 끝내고 나오면서도 그는 그랬다. 그는 담배를 여전히 물고 「카메라」기자들 앞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익살 섞인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유머」정신은 바로 영국국민의 마음에 평화와 희망의 입김을 불어 넣어주었다. 웃으며 덤벼드는 자야말로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모른다. 그는 영국국민들에게 그런 여유를 주려고 했었다.
중국의 문필가 임어당은 『웃을 줄 모르는 무능 때문에 「카이저」와 「빌헬름」은 한 제국을 잃었다』고 빈정댄 일이 있었다. 그는 세계의 외교관들이 모인 회의장에서 더도 말고 10씩만 『미키·마우스』의 영화를 상영한다면 어떤 전쟁이든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코미디」가 넓은 「유럽」대륙에서도, 유독 「프랑스」에서 문학의 한「장르」로 발전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히틀러」는 독일에서는 있을 수 있었지만, 「프랑스」인 「히틀러」는 도무지 상상도할 수가 없다.
「코미디」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코모스」(komos)와 「오이데」(oide)의 회의어다. 축제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
「그리스」사람들은 주신「디오니소스」의 축제 때면 유쾌한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익살로 곯려주곤 하는 풍습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코미디」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런 풍습은 문학의 한「장르」로 발전해 오늘날 소극(보드빌)과 「코미디」로 한 경지를 이루게 되었다. 「보드빌」은 흔히 해학·흉내·착각·미끄러지기·뒹굴기 등 「메커닉」한 수단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겐 한결 정신의 위안을 준다. 「서커스」 등이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코미디」는 「보드빌」에 한발 더 앞서 사회나 인간의 내면 등을 풍자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깊은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고대「그리스」의 「코미디」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는 눈먼 철학자나 정치가가 흔히 등장한다. 「러시아」작가 「고끌리」의 『검찰관』, 「버너드·쇼」의 「코미디」도 그런 풍자극의 백미들이다.
「갈등희극」「성격희극」「풍속희극」「심리희극」 등은 모두 「코미디」가 발견해 이룩해 놓은 훌륭한 예술분야들이다. 다만 자연 속에 몰입해 자기와 대상과를 일체화하려는 경향을 가진 동양인들이 「코미디」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어딘지 「코믹」하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민족에게는 가면극 등의 민속극을 보면 희극정신이 없지 않았다. 유려한 창을 들어도 그렇다. TV에서 「코미디」가 사라진다니 새삼 생각나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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