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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 더위에 지친 심신 가을맞이 위해 가다듬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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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가을을 말하기엔 아직 성급하다 나무랄까, 그러나 천지가 불붙는 한증막처럼 끓던 그 폭염은 어디로 갔을까, 불과 며칠 사이에 물을 끼얹은 듯 살랑해진 바람이 아침저녁은 제법 살갗에 싸늘하다.
유리창에 부서질 듯 쏟아지는 이른 새벽 새소리도 말갛게 높아지고 그렇게 목을 짜내던 매미울음도 간데 없다.
처서-.
계절의 분수령을 넘어가는가. 치덕치덕 지분이 벗겨지고 잔치에 지친 노기의 흐트러진 매무새처럼 추연한 여름이 「헤세」의 글귀그대로 『피곤하여 눈을 감는다.』 마루문을 닫고 가득한 오후의 질 해 속에 앉아 있어도 조금도 덥지 않은 그 요사스런 기온의 변화에 새삼 놀라며 어느덧 마음 한구석 금이라도 간 것처럼 덜컹거려지는 것이다. 공연히 서성거리며 집중하지 못하고, 그러다 회심곡 한 곡 틀어놓고 콧잔등 시큰하게 계절무상 인생무상을 복습하는 감상에 빠져보기도 한다.
들은 풍월로 얻어 읽은 한 시 한 수.
고가일곡엄명경
작일소년금백두
-한 곡조 소리 높여 거울을 바라보니 소년은 간데 없고 흰머리 나부낀다-.
(허혼)
참으로 한 곡조 소리 높여 불렀다고 생각한 것은 꿈같은 순간이었다. 문득 거울을 보니 어제의 소년은 간데 없고 흰머리 나부끼는 백발뿐, 그처럼 여름도 사라져 간다.
시간은 여념 없이 흐른다. 싫어도 발 밑에 낙엽을 실어다 붓고 기승부리는 바람을 부추겨 할 수만 있으면 눈감고 피해가고 싶은 가을의 함정 속으로 여지없이 끌어들여 별 수 없이 뽕짝 같은 애상에 젖게 하고 얌전하던 마음을 산란하게 흔들어 놓는 것이다.
기실 시간 그 자체는 무한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 속에 방치된 인간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종말을 향해간다. 계절의 전이에 우리가 그처럼 민감한 것도 바로 자신의 종말을 자로 재듯이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밤과 낮, 춘하추동 그러한 때의 변화가 없다면 인간의 의식도 그만큼 느긋하고 완만할 것을, 때의 징후는 너무도 분명하고 사람의 감각은 그보다 더 요사스러우니 사물의 끝을 보는 듯한 두려움을 어느 순간엔들 느끼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매사 유유자적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는 인정의 취약성도 바로 그러한 무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우리들 등뒤에선 언제나 때의 전차가 하늘을 날으는 날개소리 들리고 그 너머 피안엔 광대한 영원히 사막처럼 널려있다.』 『그대 할 수 있는 동안에 장미꽃을 꺾어라. 때의 심술쟁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청춘이야말로 최량의 때이고 그때를 놓치면 아무 것도 없음을 시사한 옛 시인들의 시귀들도 기실 인간의 육체적 쇠퇴와 그 허망함을 통감하여 이렇게 노래한 것이리라.
손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엔 끝이 있다. 물질도 생명도 예술도 때가 오면 소멸되고 망각되고 무로 돌아간다. 다만 영원히 같아 남아 기억되는 것은 마음뿐이다. 신의 기량을 닮은 마음뿐이다. 한 폭의 명화가 천년을 넘어 보존된다면 그것은 그 속에 쏟아 넣은 한 인간의 무한대한 마음 때문이다. 신의 기량을 닮은 마음 때문이다. 손으로 건네어지는 모든 것은 손에서 소멸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건네어지는 것은 마음속에 남는다. 마음만이 영원으로 통하는 통로다.
마음은 무한을 꿈꿀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과거와 미래를 내왕할 수 있다. 『달나라로 가는 길 어디에서도 나는 신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호언한 소련의 우주인 「가가린」은 그 실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잊고 있었던 것이리라.
처서-.
계절의 분수령을 넘어 곧 가을이 온다. 들의 곡식을 영글리는 마지막 타는 햇살도 어느 날 숨죽고 축제처럼 들떴던 산과 들에도 낙일이 오리라. 자리를 떠났던 모든 것이 자리로 돌아가 앉는 시간, 나무가지의 새들은 하늘로 돌아가고 길을 떠난 여름나그네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학생들은 학교로 일꾼들은 일터로 생각하는 마음들은 침묵으로 돌아간다. 침묵의 포도주 속에 마지막 성숙을 손질할 것이다.
홍윤숙<시인>
▲평북 정주출생
▲48년=서울대사대 3년 수료
▲50년=『신천지』통해 시단「데뷔」
▲58년=신춘문예 희곡당선
▲74년=한국시협상수상·현「펜·클럽」중앙위원
▲저서=『여사시집』 『일제의 시계소리』 등 시집과 『자유, 그리고 순간의 세상』 등 수필집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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