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냄새」가 나야 여류시인가"-평단일각의 비판론을 논박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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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근 문단 일각에서 과연 「여류」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는 문제에 화제가 쏠리고 있는 것 같다. 이같은 화제의 발단은 평론가 김영무씨의 『여류를 읽는 아픔』이란 서평형식의 글에서부터였고 바로 그 서평의 대상이 됐던 한 여류시인의 반론이 제기된 후 이 문제는 꾸준하게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우리문학에 있어서 암시하고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여류들을 일반 문학가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여류」라는 말을 붙여서 어떤 복수집단이나 「그룹」으로만 몰아붙이려는 데에 깔려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좀더 직선적으로 표현하자면 「여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좀 특수한 존재로 받아들이면서 어쩌면 좀 후하게 바라보겠다는, 따라서 한풀 접어주겠다는 남성 특유의 우월의식이 아닌가싶다.
어떤 평론가는 「인형의식」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것인데 이런 투의 어설픈 우월의식이 조장하는 편견이나 독단이 바로 문제다. 문학에도 남류문학과 여류문학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또 여류문학은 일부 남성문인들이 내세우는 그 우월감만큼이나 저급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남류문학은 그만큼 고급한 것일까.
더욱 아연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류문인의 글을 비난하는 분들의 마치 근엄한 국민학교 선생님같은 그 교조성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여성시인들의 시에서는 생활의 냄새가, 살림살이의 흔적이, 때로는 극성스럽고 억척같은 아낙네의 숨결이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라는 비난이 아마도 이런 교조성의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한다.
이런 문맥을 놓고 가만히 그 뜻을 역으로 따져보면 살림살이나 생활의 냄새, 다른 말로 하면 요즈음 흔히 쓰이는 이른바 「현실」이 나타나고 보이는 시만이 훌륭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이 들어가 있는 시만이 훌륭하다는 것인데 문학의 가치를 논하는데 있어 이처럼 사고가 경직화되고 「도그머」화되었다면 이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다.
다양성과 구체성을 그 가치로 삼는 문학에 있어서 시인이 자기 시를 통해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든 자연을 이야기하든 또는 그것을 초월한 어떤 이야기나 「비전」을 제시하든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은 바로 그 시인의 인생관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살림살이나 그런 번잡한 일들이 참다운 본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는 그런 일상적인 번거로움을 초월한 그 무엇이 우리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삶을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하는가는 그 시인의 자유이며 문제는 삶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든 어떻게 그것을 참으로 삶답게 보여주는 가이다.
작자의 건강하고 치열한 시정신과 함께 시가 곧 그 시인의 개성이라고 하면 『여류시인들이 생활의 바깥쪽보다는 생활의 안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있는 것 같다』는 말도 무심히 넘겨 버릴 수 없는 여류시인들의 반성해야할 점이라고도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교조성을 노출시켜 김치냄새나 연탄집게나 빨래이야기가 없으니 그것은 나쁜 시라는 논리는 얼마나 치졸하고 황당한 몰상식인가. 김치냄새나 빨래판이나 기저귀가 나오지 않고 한이나 서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시정신이 남성화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여류」운운의 말 뒤에 감추어진 남성우월감의 문학은 오로지 공리적일 것, 현실 운운해야 할 것 같은 수직적인 사고의 경직성을 우리는 다같이 슬퍼한다. 「여류」라는 이름이, 편의상 남녀구분을 위해 어쩔 수없이 붙여졌다면 거추장스럽지만 받아들이겠다. 【<시인>노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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