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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인사 돕는 법 … 관피아 만드는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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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011년 4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수상레저안전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재석 의원 197명 중 196명의 압도적 찬성(기권 한 명)이었다. 주 5일제에 맞춰 수상레저 활동의 대중화를 도모하고 관련 사업자들에 대해 신고제를 도입하는 게 이 법의 골자다. 그런데 이 법안 28조 2항엔 “수상레저 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수상레저 관련 종사자의 안전관리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해 한국수상레저안전협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한다”는 협회 설립 규정이 들어갔다. 이 규정이 근거가 돼 해경 출신들이 줄줄이 수상레저안전협회에 ‘재취업’됐다. 현재 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해경 차장(치안정감)을 지낸 이상부 회장이다. 직전 회장도 해경(치안감) 출신이다. 이 회장을 포함해 지역 지부장 등 4명이 해경 출신이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춘진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협회에 회장·감사·사무총장·지부장 등 해경 출신 5명이 포진했다. 이게 셀프 재취업이 아니고 뭐냐”고 문제를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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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부와 업계의 유착을 감시·견제해야 할 국회가 오히려 ‘관피아(관료 마피아) 법’을 양산하면서 입법부로서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법안을 처리하면서 퇴직 관료들의 낙하산 재취업 자리로 변질될 수 있는 ‘협회 설치 끼워 넣기’를 합법화해 주고 있어서다. 비슷한 사례가 수난구호법이다. 2011년 12월 국회에서 재석 212명 중 전원 찬성으로 통과된 수난구호법 개정안은 역시 한국해양구조협회의 설립 근거를 마련했다. 민관구조 체제를 만들자는 취지로 법안을 마련하면서 슬며시 협회 설립조항을 끼워 넣었다. 이 법이 통과된 이후 해경 출신 6명이 협회에 재취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지난 4월 크루즈 산업 육성·지원법률 제정안을 통과시켰다. 동북아의 크루즈 시장이 확대되는 데 발 맞춰 외국 국적 크루즈의 국내 기항과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국제 순항 크루즈에 카지노 설치를 허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면서 직접적 관련이 없는 크루즈산업협회 설립 조항을 끼워 넣었다. 법안 16조는 “해양수산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크루즈산업협회를 설립할 수 있다”고 했고, 해수부 장관에겐 협회 정관을 인가하며 감독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이 법안은 세월호 참사로 제동이 걸렸다.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법사위가 문제를 삼고 있어서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해수부 장관이 통제하는 협회는 해수부 퇴직 공무원들의 은신처로 변질되기 십상”이라며 “동시에 협회 자체가 퇴직 관료와 업계가 한자리에 모여 크루즈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로비단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발의된 아프리카미래전략재단법 제정안도 관피아 법 논란에 휘말려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연구와 기업 진출을 위한 조사·연구기관으로 37명 정원의 재단을 만든다는 게 법의 골자지만 퇴직 외교관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비판이 일면서 법사위가 막고 있는 상태다.

 관피아 법은 공기업이나 정부 산하단체를 넘어 민간 부문으로까지 퇴직 관료들의 낙하산 재취업을 구조화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찬열 의원은 “2011~2013년 주요 협회 79곳에 취업한 퇴직 관료가 141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들 법안의 상당수가 의원입법 형식으로 국회에서 발의된다는 점이다. “입법부가 행정부 견제라는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하지 못하고 관피아를 방조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논란이 되고 있는 수상레저안전법·수난구호법·크루즈산업법·아프리카재단법은 모두 여야 의원들의 이름으로 법안이 발의됐다. 이 중엔 순수하게 의원들이 발의해 입법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부부처의 입장을 대신해 의원들이 이름만 빌려 주는 ‘청부 입법’도 적지 않다는 얘기가 의원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법사위의 새누리당 의원은 “예컨대 공공기관 설립 때 기획재정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까다롭다 보니 관피아들이 의원입법 형식으로 발의하고, 해당 상임위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법사위로 넘긴다”며 “국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행정부의 조직 이기주의를 도와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채병건·천권필 기자

◆협회 끼워넣기=기존 산업의 발전을 위해 만드는 각종 법률의 제정안·개정안에 업무 관련성이 있는 업계나 부처의 협회 설립안을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수난구호법안에 한국해양구조협회 설립에 관한 조항을 넣거나, 수상레저안전법안에 한국수상레저안전협회 설립 조항을 넣은 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관련 분야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지만 부처의 퇴직자들을 위한 자리 마련과 업계의 이익을 결합시켜 법제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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