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 슬픈 어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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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해 한번 「어버이날」이라는 게 있어서 불효한 자식의 마음을 뉘우치게 된다. 밤낮으로 쫓기고 고달픈 하루하루의 삶을 되풀이 하다보면 어버이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조차 점점 줄어드는 이즈음의 우리들의 생활이니 「불효의 뉘우침」이 1년에 한 번 즘은.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이날을 제정한 모양이다.

<「반항」받고야 위치자각>
이처럼 「어버이날」은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생각하는 날이라 할 것이지만, 이제 두 어버이를 다 잃은 지 몇 해를 지나고 나니 뉘우침은 그저 뉘우침으로 그치고 어찌할 길조차 없게 되었다.
자식을 낳아 30여 년이 되건만 어버이 입장에 내가 있다고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사람은 그토록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자리에 대한 자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별 탈없이 그저 「무사고」로 지내는 동안에 자신은 잘하는 어버이로 자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의 「반항」을 받고 날벼락이나 떨어진 것처럼 당황하게 된다. 처음엔 펄펄 뛸 정도로 정신이 전도되었다가 『이럴 수가 없다』는 말을 되뇌며 눈물을 흘리는 게 그 첫 과정이다. 결국 자식의 번민은 송두리째 그 어버이의 산의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고야 만다.

<「사랑」이 「사슬」안되게>
이때부터 어버이와 자식은 세상 백 가지 일 다 안중에 없고 오로지 이「부모와 자식」이라는 인간 원초적 관계에 대한 몸부림치는 씨름만이 전개된다. 『어려서는 치맛자락에 매달리던 자식이 커서는 어머니의 가슴을 박차고 나간다』는 속담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염려하지 않으랴. 이 기원과 염려는 간절하면 할수록 자식에게는 무겁고 역겨운 짐이 되는 것인 줄 모르고 줄창 어버이 욕심과 고집으로 자식을 얽맨다.
자식은 그 「어버이의 사랑」이란 사슬에 묶여 손도 발도 안 나오고 숨이 정말 막힐 지경이다. 세상이 그래도 어수선하고 선량한 풍토를 이루었을 때는 아이들은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기가 쉽다. 요즘 같은 겁탁난시에 태어난 자식들은 안에서도 숨막히고, 밖에서도 숨막힌다. 일류학교 병 대문에 어린 날을 무거운 책가방과 씨름하며 학원공부다 가정교사다 자랄 수 없게 하고, 정신적으로는 정치다 도덕이다 머리가 터지도록 주입시킨다. 그리고 불량식품에, 오염환경에, 우리가 자식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자연이 사람 키우듯>
어버이는 그 자리가 「천지자연」을 대신하는 자리다. 자연은 우리를 더함도 덜함도 없이 성장하게 한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오직 자라나는 그 곳에 있다.
어버이는 자식을 자라게 해야 한다. 자식이 경마장의 말이 아닌 이상 그토록 어려서부터 경쟁의식만 채찍질하며 가르칠 것이 아니라 진정 이 아이 적성에 맞는 일을, 살아가는 데 「일거리」를 주도록 일하는 능력을 키울 것이며, 너무 많은 덕목으로 강요할 게 아니라 흙과 동물과 친구 가족 등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병폐는 부모가 너무 지나치게 아이의 생을 대신 살아주는데 있다. 그것은 어린이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생각으로 실장은 어린이의 자라나는 생명의 싹을 짓밟는 행위를 하고있는 것이다.
어버이날에 어버이는 슬프다. 내 한 가정에서 자식을 잘 자라게 하기도 어려운데 사회는 또 무엇을 우리 다음 세대에 해주고 있는가.
이남덕<이대교수·국문학>
▲1920년생
▲45년 경성대 국문과 졸
▲70년 이대서 문학박사학위·학위논문『15세기 국어의 서법연구』
▲53∼54년 동아대·55∼58년 숙대교수 역임
▲58년∼현 이대 국문과교수
▲논문=서사시 『단군 탄생』(71년)『한국어 형태소 분류론』(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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