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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속수무책의 슬픔 앞에 서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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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손철주
미술평론가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슬픔에 빠진다. 슬픔이 지나쳐 자책하는 마음이 일고, 자책이 심해지면 자학으로 나아간다. 당나라 시인 원진의 시를 보니 그렇다. 그가 아내를 애도하며 쓴 시에 ‘오로지 한밤 내내 눈을 뜨고 지새워/ 평생 눈썹 펴지 못한 그대에게 보답하려오’라는 구절이 있다. 여생의 기나긴 밤을 눈 안 감고 지새워 본들 한평생 이맛살 찌푸리며 살다간 아내에게 보답이 되기나 할까. 남들 눈에 안타까운 자학일 뿐이다. 하지만 당한 자는 다르다. 보답이 되지 않음을 번히 알기에 산 자의 자책은 뼛속에 파고들고,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하는 이를 만날 가망이 없을 때, 그 절망이 자청한 자학의 몸부림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다.

 살아남은 자의 자학은 또 죽은 이에 대한 턱없는 원망으로 번진다. 귀양 살다 뒤늦게 아내의 부음을 들은 추사 김정희는 제문을 지어 통곡했다. ‘끝내 그대가 죽고 말았으니 먼저 죽는 것이 무엇이 족해 나로 하여금 두 눈 빤히 뜨고 살게 한단 말이오’. 그것도 모자라 추사는 뒷날의 시에서 거푸 원망한다. ‘어찌하면 월로(月老)에게 하소연하여/ 내세에 부부가 바꿔 태어나고/ 내가 죽고 천 리 밖 그대가 살아/ 이 서러움 그대에게 알게 하리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 아무 손써볼 도리가 없는 막막함, 그 막막함에서 자책과 자학과 원망이 뒤엉킬진대, 막막함이란 본시 아득하고 어렴풋한 감정이어서 무슨 일이 파생될지 도무지 모를 성질이다. 슬픔은 겪는 자나 보는 자나 속수무책인 사태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있다. 내남 없는 슬픔이다. 이 집단적 슬픔에서는 덜 슬픈 자가 더 슬픈 자를 위로할 길이 안 보인다. 슬픔은 맹렬하게 옮아가 더 슬픈 자를 만나면 덜 슬픈 자는 그보다 더 슬퍼진다. 자책과 자학과 원망도 가지를 치고 벋나간다. ‘세월’의 시옷 자도 발음하기 싫고, 분노의 삿대질이 하늘을 찌른다. 슬픔이 분노와 섞이자 분노는 슬픔을 심화하고 슬픔은 분노를 증폭한다. 이토록 착종된 감정의 민낯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했다. 한심한 백면서생이라서 나는 슬픔에 관한 책을 뒤적이며 겨우 나의 슬픔 따위나 달래고 있다.

 내가 손에 든 책은 『슬픔의 위안』이다. 미국 작가 두 명이 온갖 슬픔을 겪은 이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슬픔을 맞닥뜨리고, 슬픔에 빠지다가,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이 육성 증언으로 펼쳐진다. 여러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만나는 아름다움은 심장을 꿰뚫는 칼과 같다’는 토로는 얼마나 가슴이 메는가. 유족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지우고 싶은 심정일 테다. 놀라운 것은 수전 로웬스타인의 사례다. 그녀는 미국의 조각가다. 1988년,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12월 21일 스코틀랜드 상공을 날던 뉴욕행 팬암기가 테러로 폭파됐다. 탑승객 259명 전원이 죽었다. 21세 금발의 씩씩한 대학생인 그녀 아들도 세상을 떴다. 동승했던 같은 대학 급우 34명과 함께.

 아들의 유해를 건네받은 로웬스타인은 경악했다. 관은 지저분한 화물 사이에 놓였고, 뚜껑에 ‘오염물-열지 마시오’라고 적힌 테이프가 붙었다. 그녀는 ‘아들이 쓰레기처럼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이후 15년에 걸쳐 그녀는 한 가지 일을 했다. 희생자 가족들을 자신의 작업실로 불러 포즈를 취하게 했다. 각자 사랑하는 이의 사망 소식을 듣던 바로 그 순간의 자세였다. 76명의 벌거벗은 군상, 비탄에 잠긴 등신대 조각, ‘어두운 비가 ’는 그렇게 완성됐다. 유족은 모두 자신의 슬픈 맨 몸뚱어리를 두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슬픔을 명백히 현존하는 확고부동한 자세로 굳히고 그 너머에서 치유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을까. 이 조각은 뉴욕의 몬톡에서 여전히 전시되고 있다.

 로웬스타인은 검시관이 찍은 아름다웠던 아들의 흉측한 사진을 일 년에 한 번은 억지로 본다. 그녀는 고백한다. “증오는 모든 것을 보기 흉하게 만들지요.” 로웬스타인은 심장을 찌른 그 칼로 아름다움을 빚고 있는 조각가다. 그렇다 해도 아직은 이르다. 슬픔을 직시하며 슬픔을 극복하라고 말할 염치가 없다. 어느 심리학자의 지적대로다. 그들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 한쪽 끝을 우리가 잡고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는 말이다.

손철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