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학의 태두…청학의 선비 김상기 박사의 학문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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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빈 김상기 선생의 부음을 듣고 놀라움과 애도와 회한이 교차함을 금할 길 없다. 수3년래 숙환으로 누워 계셔서 언젠가는 당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였지만 선생은 병석에서도 남에게 통증을 호소하는 일이 없고 자세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었기에 이다지 갑자기 서거하실줄 모르고 연초에 뵙고서는 세사에 쫓기어 다시 뵙지 못하다가 이제는 드디어 그 단아하신 영정을 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해방 전에는 중앙고·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을 잡으시면서 역사학의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처음 논문인 『동학과 동학난』은 오늘날에도 참고되는 문헌이지만 1930년대에 불과 40년 전의 사실을 연구의 대상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놀라울만한 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이 일찍이 조도전대학에서 사학·사회학을 함께 닦은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후 선생은 한국사,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사, 중국 고대사의 분야로 연구를 뻗쳐 이 나라 동양사학의 어버이가 되었다. 특히 중국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청유들의 논저까지도 넓게 참작하는 학문적 깊이와 성실성은 후진에게 추앙의 대상이었다. 선생이 만년에 힘을 기울인 방대한 저작 『고려시대사』는 사료에 충실한 통사의 한 모범을 이루고 있음이 정평이다.
청렴한 학자로 일관한 선생은 진단학회 역사학회 동양사학회 미술사학회에 지도적 역할을 하셨고 학술원 종신회원이며 만년에는 백산학회를 이끌었다. 서울대박물관장 문리대학장 등의 보직을 맡고 문화재 위원으로 크게 활동하셨다.
재리를 모르고 타협을 싫어하며 거의 평생을 같은 집에서 사시면서 1차의 외국여행도 하려 들지 않았던 것도 선생의 견개하다할 성품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생전의 기주에 부응하지 못했던 불초 문생은 상가 영전에 헌작합니다. [고병익<동양사·서울대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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