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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유가에서 인정하는 혁명권인 이른바 반정이라는 수단으로 연산군이 몰려나자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전왕의 비정을 개혁하려고 많은 사류를 등용하였다. 이런 가운데 점차 두각을 나타낸 것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였다.
그들은 3대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지치주의를 목표로 하여 경연에 나가 진강을 할 때에도 조강이 일모에 이르도록 철인군주의 이론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숭도의·정인심·법성현·흥지치』라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이들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못 되었다. 이런 도학적 언행에 권태와 압박을 느끼고 염악의 정이 생긴 눈치를 챈 희빈 홍씨 등은 『일국의 인심이 조광조에게 돌아가니 그는 반정에 공을 세운 자들을 삭훈하여 왕실의 우익을 없앤 뒤에 소지를 이루려고 한다』는 유언을 퍼뜨리게 하였다.
또 『주초위왕』, 즉 조가 왕이 된다는 글을 금원 내의 나뭇잎에 감즙으로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여 문자로 남은 것을 궁인을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이런 무고로 자임과 자신이 만만하여 그들이 바라던 정치가 곧 목전에 닥쳐올 것을 기대하던, 아직 30대의 소장들이 비명에 가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숙종은 50년에 가까운 긴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당쟁에 망살되어 정국의 변전이 무상하였다. 궁중에서는 민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희빈 장씨를 정비로 책립하였다가, 몇 해 뒤에는 다시 장희빈이 민비를 저주하였다고 친국(신문)끝에 사사를 거부하자 이를 압사케 하였다. 또 미구에 그의 소생인 세자(뒤의 경종) 모해설이 나돌자 다시 엄한 형문이 반복되었다.
이런 일과 얽혀 부중에서는 남인이 집권하고, 소론이 중용되고, 노론이 재집권하는 등 당쟁의 폐가 두드러졌으며 그때마다 「출척」·「변」·「환국」·「옥사」라는 이름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 앞에 목숨을 잃은 「군자」·「소인」의 이름은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애증의 감정이 모호한 전제군주의 일희일노가 바로 정국의 변전을 가져왔으니 그 막강한 힘에 놀랄 뿐이지만, 한편 평형을 잃은 왕의 감정을 틈타 이를 격동시킴으로써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군왕이 무언에 완농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간을 제하고 무를 척하는 것이 이른바 지도층의 덕목으로 여겨져 왔건만 이를 지켜나간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지. 이성계가 등극한 뒤에 주위에서 전 왕조의 유신 이색을 논죄하자 『너희 가운데 이장보다 나은 사람이 있는가』라는 한 마디로 물리친 일과, 세종이 양녕대군을 탄핵하는 상소가 있자 『앞으로는 동기의 정도 모르는 조신을 다스리겠다』는 말이 아름답게 전해질 정도다.
검찰은 새삼 앞으로 무고·중상 등을 엄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법으로 3천만이 모두 인격자가 될 수야 없겠지만 무고의 적폐를 일소하는데 큰 계기가 되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섣불리 건드렸다간 무고를 받았다는 새 무고의 건수만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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