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김천혜|신춘「중앙문예」평론 당선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C, 객관적 시점
「우젤」을 비롯한 영·미계 학자들의 분류근거는 『설화자가 작중인물의 마음속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것이지만, 독·불계에서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프란츠·슈탄첼」(F·stanzel) 이나「토도로프」(T·Todorov) 같은 사람들이다.
영·미계의 분류가 작품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본 분류라고 한다면「슈탄첼」의 분류는 독자의 입장에서 본 분류다.
즉 그는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어떤「이야기꾼」(설화자)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분류한다.
소설에는 독자에게「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느껴지는 소설이 있고, 독자를 작중인물과 완전히 밀착시켜 사건의 현장에 있다는 환각을 불러일으켜「이야기꾼」의 존재를 느끼지 않게 하는 소설이 있다. 이야기꾼의 존재를 느끼지 않게 하는 소설을「인물소설」이라 하고 이야기꾼의 존재가 느껴지는 소설에서 이야기꾼이 3인칭이면「설화자 소설」, 1인칭이면「자아소설」이라고 하여 시점을 셋으로 분류하고 있다.
「슈탄첼」이 독자의 입장에서 시점을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면,「토도로프」는 설화자와 작중인물과의 관계를 가지고 시점을 분류하고 있다. 즉 설화자가 사건의 진행에 대하여 작중인물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느냐, 적게 알고 있느냐, 같은 정도로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①설화자 > 작중인물
②설화자 < 작중인물
③설화자 = 작중인물
「슈탄첼」이나「토도로프」의 견해도 충분한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미쪽의 분류가 보다 세분되어 있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 이론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분류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 시점문제는 단지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는 분류의 문제만이 전부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시점문제는 분류의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시점문제가 가진 문젯점들을 양론 하면서 새로운 싯점의 설정과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시점의 열거를 시도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B, 설화자의 존재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설화자가 과연 작가 자신이냐. 그렇지 않으면 작가에 의하여 창조된 독립적인 존재냐에 대하여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1인칭 소설의 설화자가 작가자신인 경우는 별로 없고 대개 작가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이다. 이점은 작품자체가 명백히 밝혀주기 때문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3인칭 소설의 경우에는「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설화자가 작가자신이냐, 작가와 독자사이에 설정된 가공의 인물이냐에 대하여「우젤」,「페린」「쾨테·함부르거」(Kate Hamburger)등은 설화자와 작가를 동일한 존재로 보고 「바네트」,「슈탄첼」,「볼프강·카이저」(Wolfgang Kayser)등은 별개의 존재로 본다.「함부르거」의 말을 들어보자.
『작 의 투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공의 설화자, 다시 말하면「작가에 의하여 창조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나」「우리들」「우리들의 주인공」등의 1인칭 어구로 이러한 인상을 일으키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런 설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단지 이야기하는 작가와 그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 다만 작가가 실제로 어떤 설화자를「창조」한 경우, 즉 1인칭 소설에서만 이「가상적 설화자」가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슈탄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설화자는 얼핏보면 작가와 동일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거의 항상 작가의 인격과는 이질적인 요소가 설화자의 존재속에 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작가에게서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설화자는 더 적게 알고 있거나 때로는 더 많 이 알고 있다. 그는 때때로 작가의 의견이라고 반드시 볼수 없는 의견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설화자는 작중인물과 마찬가지로 작가에 의하여 참조된 독립적인 존재다. 이 설화자에게 본질적인 것은 이야기의 중개자로서 소설의 가상세계와 작가와 독자가 생존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중간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또「토마스·만」도 한때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소설속의 논평적 사설, 즉 작가의 개입은 예술영역에서 제외시킬 필요가 없다. 【…】그 사설은 작가의 말이 아니고 작품 자체의 말이다. 』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토마스·만」은 어떤 설화자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고, 이것이 작가와는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상반된 견해는 어느쪽이 절대적으로 맞다든가 틀렸다든가 하는 논증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설화자가 작가에게서 독립된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카프카」는 미국에 가본 일이 없지만 소설『아메리카』를 썼다.『아메리카』에는「뉴요크」항의 자유의 여신상이 묘사되어 있고「오클라호마」로 향하는 기차에서 본 대륙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미국에 가본 일이 없는「카프카」가 어떻게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미국의 풍경을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논리적일 것이다. 이른바 역사소설도 그러하다. 5백년 전, 천년 전에 살지 않았던 작가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작가가 창조한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논리적일 것이다. 주인공과 더불어 어디에 나갈 수 있고 누구의 마음속이라도 꿰뚫어 보는 이 전지전능한 이야기꾼은 분명히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인 작가 자신은 아닐 것이다. <계속>
목 차
Ⅰ.서 관
Ⅱ.시점에 대안 고찰
A. 제리론
B. 설화자의 존재
C. 시점의 종류
D. 시점의 선택과 전이의 문제
Ⅲ. 결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