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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과 그는 정말 다른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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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30면

장면 총리는 군부가 봉기할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일찍이 네 차례나 받았다. 심지어 박정희 소장은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의 책상 위에 거사 계획서를 올려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정희 소장은 무사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대 1개 여단을 주력으로 불과 3600여 명의 병력이 한강을 건너 육군본부를 점령한 뒤 정부의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5월 15일 밤 요정에서 술을 마시던 장도영은 쿠데타가 실행되기 일보 직전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쿠데타 진압을 위한 결정적 조치는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는 헌병대의 중화기 무장 요청을 불허했다. 게다가 한강대교를 막되 차량 한 대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남겨두라는 괴상망측한 명령을 내렸다. 5·16쿠데타의 진정한 리더는 박정희가 아니었다. 당파와 정쟁과 기회주의에 찌들어 썩은 대한민국의 미필적 고의였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도망쳤지만 대사관 측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혜화동에 있는 한 수녀원에 숨었다. 그는 주한 미국 대리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유엔군사령관이 쿠데타군을 진압해줄 것을 요청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는 죽어도 밝히지 않았다. 최고 책임자가 그러고 있는데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5월 18일 낮 12시 55시간이나 잠적했던 장면 총리는 어물쩍 나타나더니 기껏 한다는 게 내각 총사퇴였다. 황당해진 유엔군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리대사는 헌법상 국군 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에게 쿠데타군 진압 명령을 내리라고 독촉했다. 그런데 민주당 구파였던 그는 신파인 장면의 실각이 영 기분 나쁘지는 않아서였는지 박정희 소장이 자신을 찾아오자 이렇게 말했다. “올 것이 왔구려.”

1979년 어느 가을날 궁정동 안가에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박 대통령이 연회를 벌이고 있다는 옆 건물에서 총질이 났는데도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아 이후 신군부에게 내란방조죄로 몰리며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다. 12·12의 그 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공관 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북한 공비가 쳐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며 가족들을 데리고 단국대로 도망쳤다가 나중에는 미8군 연합사로 숨었다. 결국 노 장관은 국방장관 체면에 보안사로 잡혀가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에 대한 사후 재가 서류에 사인했고 최규하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하게끔 설득하는 역할까지 해야 했다.

대한민국 고위층들이 공연한 저 엄청난 분량의 블랙 코미디는 5·16 때의 그것에서 연기자들만 좀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 제대로 작동하는 조직은 전두환의 ‘하나회’밖에 없었다. 그들만이 강했고, 그들만이 빨랐고, 그들만이 치밀했고, 그들만이 열정에 차 있었다. 경제발전의 공적은 열외로 하고, 오로지 민주주의의 가치와 그 성취 과정에서 지불해야 했던 죽음과 고통에 주목해 본다면 저들 ‘바보들의 행진’이 저지른 죄는 하늘을 뒤덮고도 남는다. 악보다 더 극악한 것이 나태인 셈이다.

이렇듯 각자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전체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애국심에 선행하는 것이 제 직업에 대한 사명의식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깐깐하게 원칙을 지키면서도 치열하게 혁신하려는 일꾼이 칭송받기는커녕 피곤한 괴짜로 찍히기 일쑤인 것 같다.

당신은 그릇된 시스템 속에서도 고독을 무릅쓰고 신명을 다 바쳐 제대로 일하려는 장인(匠人)을 낙담케 하거나 좌절시킨 적은 없는가? 당신이 임하고 있는 그 조직은 아이들을 가득 태운 맹골수도 위의 세월호가 아닌가?

지금 당신이 세월호의 선장을 저주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신에게 그처럼 전락할 만한 ‘결정적인 기회’가 아직까지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요행이 얼마나 갈까? 우리들의 부도덕은 너무나 유서 깊고 교활해서 차마 우리들 스스로 우리들의 피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이들을 가라앉는 배의 객실에 가둬둔 채 가장 먼저 탈출해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는 선장의 모습은 한 개인이 아니라 이 사회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단 열 명이라도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노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다. 아이들을 바다에 생매장시키고도 그 죽음마저 능멸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소돔과 고모라다. 좌파건 우파건, 애국자건 혁명가건, 개건 고양이건 조용히 눈을 좀 감아보라. 그럼 이제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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