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빙하의 최대 걸작 「표르드」-협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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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인 북극 여행을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줄곧 타고 온 「오이로파」호로 저녁녘에 「아이슬란드」의 서울 「레이캬비크」의 항구를 떠났다. 저 멀리 「레이캬비크」가 희뿌옇게 보일 때 문득 10세기께 「바이킹」들이 이 섬의 「레이캬비크」지점에 닿으며 「안개 낀 항만」이란 뜻으로 지었던 이 항구도시의 이름이 그럴 듯하게 보였다.
세계 여행은 여러 나라들을 비교하는데 있어서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지만 한 나라를 되풀이하여 다니는 것은 그 발전 상황을 더욱 뚜렷이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슬란드」에서 새삼 느꼈다. 1964년에 필자가 이 나라에 왔을 때 보다 월등하게 발전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었는데 국민소득이 매우 높은 편이면서도 국민들이 한결 같이 검소하고 근면하게 사는 모습에서 무엇보다도 큰 감명을 받았다.
「레이캬비크」시는 서울이어서 다른 「유럽」의 여러 문명국처럼 밤이면 환락을 누리기에 여념이 없을 것 같지만 이 나라 사람은 자기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유일의 생활 이념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과는 담을 쌓고 있어서 수도의 밤은 조용했다. 이 나라 사람은 주로 한 가족이 단위가 되어 집안에서 인생을 즐기는 것을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먼저 「바이킹」들이 발견하여 살았으나 그 뒤 근면한 국민성을 지닌「노르웨이」 사람과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와서 국민의 주체를 이루고 있어서 동면의 전통이 생겼다고 할 수 있지만 필자가 보건대는 부유한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는 쾌락주의를 저버리고 엄숙주의를 받드는 가장 모범적인 나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여객선은 「아이슬란드」연안을 끼고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항해란 속도가 늦어서 아침이 되도록 이 작은 섬의 북서쪽의 반도들을 다 빠져나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이슬란드」를 여행할 때는 날씨가 흐려서 많은 명승지들의 촬영 효과가 좋지 않았으나 정작 떠나니 구름이 말끔히 개서 하늘은 이 지역의 독특한 쪽 빛을 띠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북서단도 까마득한 빙하시대 때 생긴 「표르드」(Fiord=협만)지대로서 바닷가는 수직적이라고 할만큼 가파른 낭떠러지로 되어 있으며 그 위는 몇백m 높이의 평탄한 용암 대지가 펼쳐졌다. 여객선은 연안을 항해하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보니 현무암의 낭떠러지 밑에 생긴 약간의 흙에는 이름 모를 화초들이 나 있었다. 거무칙칙한 현무암의 낭떠러지 위엔 잔설이 희끗희끗 보이는데 물결들이 부딪치는 낭떠러지 밑에 군데군데 이런 풀들이 보이는 것은 단조로우면서도 신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낭떠러지는 흡사 얼룩말과도 같은 무늬를 지니는 것이 유독 화산 지대 다왔다. 즉 화산의 폭발로 용암이 거듭 덮여서 수평적인 지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는 아담한 어부들의 집이 몇 채 보이는데 고물선인지 아니면 난파선인지 빨갛게 녹슬어 있는 것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북극권에 가까운 이 나라의 북서단은 지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노르웨이」북해 쪽 못지 않은 「표르드」지대로서 조감도로 보지 못하고 단면으로 보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지신의 최대 걸작이라 할 「표르드」는 장관이다. 옛날 빙하시대 때 빙하가 바닷가로 내려오면서 조각된 솜씨가 역력히 보였다.
「그린란드」보다 먼저 「노르웨이」영인 북극권의 「스피츠베르겐」제도로 향하고 있는데 「아이슬란드」의 육지가 아스라이 사라졌다.
북대서양 특유의 물결도 생기지 않는 것을 보니 다른 해류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 분명하다. 여객선을 따라 오는 뜻이 날고 있는 해조들은 그 낭랑한 목소리로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 북구의 우수가 아니라 북극에의 전주곡과도 같은 묘한 노래를 읊조리는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후갑판에서는 승무원들이 무슨 축제라도 벌이려는 듯이 만국기며 불고기 모형들을 달아매는 등 법석을 떨었다. 상오 10시가 되었을 때 느닷없이 여객선에선 마치 「타이탄」의 목소리와도 같이 굵고도 부드러운 우렁찬 기적을 울렸다. 지금 북극권에 들어서고 있으며 이제부터 북극선을 통과하는 선상의 제전이 벌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