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가 개조 (2) 관료의 안중에 국민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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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월호 침몰 참사는 한국 관료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재난 대응을 책임져야 할 정부 조직이 시종 부실하고 무능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가 개조 수준으로 시스템을 뜯어고치기 위해선 정부를 움직이는 관료들의 의식 구조와 일하는 방식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침몰부터 실종자 수색까지 전 과정에 걸쳐 해당 부처와 관료들은 오직 대통령 얼굴만 바라보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노출했다. 우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뒤늦은 대처와 거듭된 발표 번복이 문제로 지적됐다. 해양수산부·안전행정부 등이 각각 사고대책본부를 만들자 이를 일원화하는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를 발족시켰으나 본부장이 총리에서 해수부 장관으로 교체되는 등 혼선이 이어졌다. 뒤이어 침몰 당시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와의 교신 녹취록과 안산 단원고 학생의 119 신고 내용이 공개되면서 해경 책임론까지 불거지고 있다.

 현장 공무원들은 실종자 가족들의 간절한 목소리도 제때 반영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지난 16일 사고 직후 “수색 현장을 보고 싶다”며 CCTV 모니터 설치를 요청했으나 박근혜 대통령이 가족들과 만난 다음에야 실행됐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가족들이 지난 20일 “청와대로 가겠다”며 도로에서 농성을 벌였다. 어제는 신속한 수색을 요구하며 사고대책본부를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여기에 사망자 시신이 뒤바뀌는 일이 세 차례 일어났다. 이 사실이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 사이에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 교육부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의 면담 결과 단원고 재학생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른들이 구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니 참담할 따름이다. 대형 재난을 앞에 두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더 큰 문제는 고위 관료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는 점이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과 강병규 안행부 장관은 각각 실내체육관, 대책본부에서 컵라면, 치킨을 먹었다. 안행부 국장은 팽목항 사망자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 했고, 해경 간부는 “80명 구했으면 대단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또 진도 실내체육관의 교육부·교육청 지원 부스에서 공무원이 실종자 가족이 지나다니는 가운데 스마트폰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장면이 목격돼 물의를 빚고 있다. 실종자 가족의 비통한 심정에 공감하고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다.

 관료들이 무분별한 언행을 일삼는 원인은 애초에 국민이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한 사람을 바라보며 승진과 퇴직 후 ‘낙하산’으로 내려갈 일자리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혈세로 봉급을 받는 공무원들이 내부 논리에 갇혀 국민을 대신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미국 링컨 대통령)가 아니라 ‘관료의, 관료에 의한, 관료를 위한 정부’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상적인 민주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관료 사회의 실력이 민간보다 뒤처지고 있는 현실도 문제다. 당장 이번 사고에서도 세월호 선체 첫 진입과 선체 시신 첫 수습이 민간 잠수사들의 성과였다. 더욱이 정부는 실종자 가족들이 강력히 요구한 후에야 움직였다. 야간 수색에 집어등(集魚燈)을 활용하기 위해 오징어 채낚이 어선들을 동원한 것도, 시신 유실을 막기 위해 저인망 어선을 투입한 것도, 잠수요원들이 동시에 수중수색을 할 수 있는 바지선을 설치한 것도 가족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전문성과 함께 의지의 문제였다. 가족들은 "조치가 뒤늦게 이뤄지면서 그만큼 구조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고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관료가 현장이 아니라 책상머리 행정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다 보니 관료들이 국민에게 갑(甲) 행세를 하면서 번거로운 절차를 양산해내고 있다. 고인이 가족임을 증명하는 ‘가족관계등록부’를 한밤중에 떼오라고 하거나, 시신을 인계받으려면 두 시간 걸리는 목포까지 가서 의사·검사의 검안 작업을 거치게 했던 것도 공급자 위주의 행정절차다. 비탄에 빠진 가족에 대한 배려는 아예 없다. 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개방·공유·소통·협력의 ‘정부 3.0’ 비전은 국민을 상대로 한 말장난임이 드러났다.

 원인은 관료들이 고시 중심의 충원 방식에 따른 기수(期數)주의와 부처이기주의에 포획돼 있다는 데 있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분야에선 과감하게 민간 부문에 협조를 구하는 아웃소싱 노력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최고”라는 그릇된 엘리트 의식이 장애물이 되고 있다. 다양한 경로로 관료를 충원해 경쟁을 유도하기 전에는 내부 담합의 폐쇄회로가 깨지기 힘들다.

  지금 국가 개조를 위해 시급한 것은 관료 사회의 시대착오적인 특권의식을 혁파하는 작업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공복(公僕)을 불신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국가의 지속가능성까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관피아’(관료+마피아) 문화를 청산하고 그들의 의식구조를 개혁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번 사고의 가장 큰 후유증은 사회의 기본 토대인 신뢰자본이 빠르게 잠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원고 학생들은 “그대로 있으라”는 선내 안내방송을 믿고 있다가 바닷속에 갇히고 말았다. 정부가 더 이상 국민의 신뢰를 잃어선 안 된다. 이제라도 신뢰를 국정 운영의 최고 가치로 두고 시스템을 개혁해 나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