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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현장에서 (1) 안전 사회인가, 3등 국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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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색 천막 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잠시 후 통곡이 터져나왔다. “내 아들 살려내! 살려내라고.”

 천막에서 나온 한 중년 남성은 뒤따라오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이 아니지?” “예. 아니에요.” 한 중년 여성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애가 안 와요. 우리 애가….” 다른 여성은 힘없이 혼잣말을 했다. “쟤랑 같이 있었을 텐데….”

 어제(20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신원확인소’엔 실종자 가족들이 쉴 새 없이 모여들었다. 아들, 딸의 얼굴을 확인한 가족들은 오열했고, 확인하지 못한 가족들은 충혈된 눈으로 천막을 나왔다.

 이날 세월호 침몰 사고 실종자 수색이 모처럼 활기를 띠면서 팽목항은 장(腸)을 끊는 듯한 슬픔과 애타는 기다림이 엇갈리고 있었다. 사고 전 한적했던 항구는 구급차와 방송사 중계차, 자원봉사대 천막들로 불철주야 병목을 이루고 있다. ‘가족 지원 상황실’ 건물 맞은편에 있는 ‘사망자 명단’ 현황판에 사망자 인상착의가 새로 적힐 때마다 가족들의 발길이 모였다 흩어진다.

 이런 상황이 닷새째 이어지면서 실종자 가족은 지쳐가고 있다. 기대는 좌절로, 슬픔은 분노로 바뀌어가고 있다. 진도 실내체육관에 있던 가족들은 어제 새벽 “정부를 못 믿겠다.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가족 대표 100여 명이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청와대를 향해 출발하려다 경찰이 제지하자 거세게 항의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을 만류하려 왔던 정홍원 총리가 두 시간 넘게 차 안에 갇혀 있기도 했다. 최상환 해양경찰청 차장도 그제(19일) 오후 실내체육관에서 브리핑을 하다가 “왜 같은 말만 반복하느냐”는 가족들의 반발로 브리핑을 중단해야 했다.

 이처럼 정부에 대한 가족들의 불신이 커진 것은 정부의 재난 대응 능력이 너무도 쉽게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학생) 전원 구조”라는 잘못된 발표가 나온 데 이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의 뒤늦은 대처가 도마에 올랐다. 더욱이 탑승자·실종자·사망자·구조자 집계가 수차례 번복되고 부처 간 엇박자 속에 수색까지 더뎌지면서 불신의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안산 단원고 학부모들은 “지금까지 정부가 한 것은 우리 요구를 뒤늦게 따라온 것밖에 없지 않느냐”고 되묻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제 저녁 팽목항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김수현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이 “기상 악화로 수색에 실패했지만 오늘 밤 네 차례에 걸쳐 조명탄을 투하하고 잠수부들을 투입해 수색을 계속하겠다”고 하자 한 참석자가 말했다.

 “나는 2011년 설봉호 화재 때 구조된 사람이다. 너무 안타까워서 부산에서 왔다. 제대로 구조하려면 마스터플랜과 매뉴얼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주먹구구식이다. 대체 몇 개월을 가려고 이러느냐.”

 그가 지적하듯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으로는 정부가 실종자 가족의 신뢰를 끌어내긴 어려워 보인다. 가족들은 “이러려고 우리가 세금을 내왔느냐”고 말한다. 체계적이고 정밀한 재난 대응 시스템과 매뉴얼 없이는 대형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우린 계속해서 국가란 무엇인가, 정부란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 서야 할 것이다. 가족은 충격과 비탄에 싸이고, 온 국민은 죄인의 마음이 되고, 사회 전체가 집단 트라우마를 겪는 사태를 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가.

 어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가 세월호의 사고 당시 교신 녹취록을 공개했다. 세월호가 진도 교통관제센터(VTS)로부터 승객들에 대한 구호를 지시받고도 퇴선 명령 등 구체적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들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압축성장에 성공했지만 생명의 가치, 안전의 가치에는 무관심했고 무신경했다. 생명과 안전은 압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았고, 안전 관리를 책임져야 할 공복(公僕)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세월호, 아니 ‘대한민국’호(號)의 고통스러운 자화상이다.

 선주·선장·승무원 등을 엄벌하고 재난지역을 선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불안 사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전 안전관리는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대형 사고가 났을 때 재난 대응 시스템은 어떻게 가동돼야 하는가. 어떻게 골든타임(결정적 시간)에 인명을 구조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마련하지 않는 한 한국 사회는 같은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수많은 외신기자가 팽목항에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다. 경제 선진국이라는 한국에서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어났느냐는 의문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결연한 각오와 의지로 안전 사회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오명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3등 국가’로 전락하느냐. 우리 앞에 이 두 개의 길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만 기다리게 하고 돌아와라.” “몇 명이라도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누구든, 그게 누구라도….”

 부두에 앉은 가족들은 어깨를 기대고 딸의 이름,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지금은 자학에 빠져 있을 때도, 한숨을 쉬고 망각할 때도 아니다. 지금은 ‘한강의 기적’을 넘어 ‘진도의 기적’을 만들어야 할 때다. 아이들은 살아서 부모 품에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좌초된 대한민국은 사고 해역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진도 팽목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