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의 모 뒤서 2년 전부터 싸움질|「보나비아」기자(전 영지특파원)가 본 중공 내홍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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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음은 지난 4월 3년반 동안의 북경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파-이스턴·이커노믹」지 기자 「데이비드·보나비아」가 과거의 현지경험과 「홍콩」에서의 최근 취재활동을 바탕으로 밝힌 중공 강경파 숙청의 배경이다. 「보나비아」기자는 또 「모스크바」주재 「런던·타임스」특파원으로 있다가 72년 소련당국에 의해 추방된 바 있다. 그는 경남대학부설 극동문제연구소주최 국제학술회의에 참석차 내한, 22일 중앙일보와 회견을 가졌다. 다음은 회견내용을 묶은 것이다. <편집자주>
온건파는 지난 8월 당산지진이 일어났을 때 하필이면 강경파로 꼽히는 심양군구의 이덕생 산하의 수개 사단을 복구작업에 투입했는데 이때 이미 강경파공격을 준비한 것 같다. 이들 병력은 지금까지도 원대복귀하지 않고 있다.
온건파의 계획이 이처럼 주도 면밀한데 비해 강경파는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서산에서 강청이 3명의 상해파 지도자들과 음모를 꾸미다가 체포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여유 있는 전략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권력투쟁이 몇 달씩 걸리는 공개적인 것이 될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화국봉과 진석련이 이들을 기습했던 것이다. 강경파가 음모를 꾸몄다면 마땅히 그들의 경호 책임자인 북경 경호대장 왕동흥의 관할지역 안에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강경파가 서산에서 체포될 때 왕동흥은 수십㎏ 떨어진 북경에 있어서 손을 쓸 수 없었다.
체포가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 왕동흥은 사태의 흐름에 따라 온건파 편을 들었던 것이다. 왕은 경비책임자로 성장한 인물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념적인 충성을 바칠 인물이 못된다.
이번 사건은 모의 생전부터 전개되어온 권력투쟁이 표면화한데 불과하다. 모는 74년 가을이래 눈앞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통제할 힘을 잃었다.
74년 말 등소평은 『이제는 힘을 모아 단결할 때다』라는 말을 포함한 실용주의적 내용의 3개 항 지시라는 걸 모의 이름을 빌어 당과 지방에 하달했었는데 얼마 후 인민일보에는 모가 『그런 것 하달한 일 없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강경파는 이 지시를 등이 조작했다고 공박했고 온건파쪽에서는 강청이 등의 3개항지시를 과장해서 모에 보고했기 때문에 모가 놀라서 자신의 지시를 부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식이 혼미한 노인(모)을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는 이런 식으로 졸렬한 싸움을 2년 전부터 벌였던 것이다.
온건파가 강청의 숙청직후에 강경파의 본거지인 상해에서 첫 반상해파 시위를 한걸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신만만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실권은 화국봉보다는 북경군구사령관 진석련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화가 공안부를 장악하고 있다지만 중공의 공안부란 소련의 KGB보다는 경찰에 가까운 조직이기 때문에 큰 실권을 못 갖고 있다. 그는 또 처음 강경파쪽에 기울다가 완전히 반전해서 온건파가 되었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정당성도 줄어들었다.
이번 사건으로 강경파는 완전히 끝장났다. 일부에서는 모가 죽은지 한달만에 모의 미망인인 강청을 숙청한다는 것은 중국적 전통에 비추어 믿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강청은 모의 생전에도 모의 부인이기보다는 4째 부인 또는 첩으로 받아들여져 일반적으로 미움을 받았다. 그런 미움은 강청이 문혁파를 이끌고 권력을 잡으려 했기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온건파가 권력을 안정시킬 경우 대소관계는 일정 한계 안에서 완화될 것 같다. 70년이래 중·소 국경에서는 자주 충돌이 있었지만 양측은 이걸 공개하지 않기로 묵계를 맺었다. 이 묵계를 발전시켜 국경문제의 부분적 해결을 도모하면서 이념적인 분쟁을 계속할 가능성이 많다.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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