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제자 김은호>|<제52화>서화백년>(58)|이당 김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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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국부호 우국한>
만주 채목 공사 이사장 우국한은 마침 여행 중이어서 그의 집안 일을 맡아보는 집사에게 내가 묵고 있는 여관을 가르쳐 주고 우 씨가 돌아오는 대로 내가 찾아왔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 씨의 집사는 한 3일 후면 도착할 것이라면서 내 이름을 방명록에 적어 두었다.
봉천에서 이곳 저곳 구경을 하면서 한 3일을 보냈더니 우 씨의 집사가 여관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를 따라 우 씨 집으로 갔다 . 우 씨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우 씨가 안내하는 대로 그 넓은 집을 쭉 돌아봤다.
그는 듣던 대로 훌륭한 골동서화의 수장 가였다. 청조가 망한 뒤 북경 곳곳에서 쏟아져 나온 귀중한 골동 서화를 3백 만원 어치나 사 가지고 있었다. 집사 외 이 그림과 골동품만 관장하는 전문 비서를 따로 두고 있었다.
우 씨는 금강산도 여러 번 탐승했고 여행을 떠날 때마다 반드시 여행가방 속에 감상할 만한 고서화 몇 폭씩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는 안방으로 나를 안내하더니『내 아들놈이 지금 나이 열 여섯인데 그림재주가 엿보이니 선생께서 서화를 좀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고맙겠소. 뭐 꼭 화가를 만들 생각은 없지만, 교양으로라도 그림공부를 시켜야겠기에 그 동안 적당한 선생을 물색해 온 터였소』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겠습니까? 선생이 허락하신다면 내 봉천에다 집 한 채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서울 내왕은 하 시라도 선생 마음대로 하시고요.』
우국한은 나의 낮 빛을 살펴 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내가 신의주에서 산「부감」과 「소」는 봉천 박물관과 북경 박물관에 기증할 생각이요. 그리고 선생이 봉천에 만 머물러 준다면 장학량 자당의 초상을 그리게 해 주겠소. 여기에 유하면서 나의 진귀한 소장품들을 마음대로 구경하시오. 적당한 때 내 초상도 하나 내 주고요 그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그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서울의 집일이 궁금했고 갑자기 추워진 대륙기후로 감기를 앓게 되어『집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그의 후의에 정중히 답하는 친서를 보냈다.
나는 서울을 떠난 지 두 달만에 봉천 역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역까지 배웅해 준 우국한은『선생만 원한다면 내 집의 고화 화를 한「트렁크」가지고 가서 보고 돌려줘도 좋습니다』고 또 한 번 호의를 보였다. 나는 나중에 와서 보겠노라 면서 그와 악수를 나누고 기차에 올랐다. 만주 넓은 벌판은 바야흐로 가을 색이 깊어 가고 있었다.
봉천에 다녀온 다음해(1930년) 제9회「선전」에는 내가 저지난해부터 마음먹었던 대로 출품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몇 년 동안 출품하지 않았던「서화 협회 전」에는 작품을 냈다.
제10회「서화협회 전」은 10월17일부터 열흘동안 휘문고보에서 개최되었다.
동양화 부에는 이상범(황원·춘산모옥·하우초무), 노준현(관폭·어초문답), 박승무(시골어떤 집·하의 산곡), 고희동(산수일대·호반), 민세호(춘경산수), 김용진(과수), 정찬영(모란·산루), 이석호(조의모란), 김경원(만추·세우), 이영일(녹), 이도영(나려기완·병풍), 오일영 (만장봉), 백윤문(포두)등 이 출품했다(괄호 안은 작품 명).
나는『화조일봉』를 출품했다. 이 때 나는 이태준에게 혹평을 받았다.
이태준이 신문에 쓴 협 전 평문에『김은호(화조일대) 씨의 화풍도 일변하였다. 할 말이 있다면 전일의 씨 솜씨는 그림자도 없이 그냥 일본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뿐이다. 이태준은 북종 화계의 채색화는 좋아하질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직후여서 일본화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태준의 평은 북화를 잘 모르는 것 같아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나는 중국 북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화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지만 내 나름대로 조선냄새가 나는 우리 북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 다음해(1931년) 제11회「협전」에는 나는 출품하지 않고 내 제자 백윤문 군이『추정』을 내놓았다.
이 때 백 군의 그림을 보고 고유섭은 일본 색이 난다는 일부 의견에『그야 상관 있나. 제 정신·제 안목만 잃지 않는다면 양식을 먹거나 왜식을 먹거나 상관없지』하고 시야가 넓은 평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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