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똑똑한 금요일] 기자가 쓴 '플래시 보이스' … '겨울왕국' 뺨치는 까닭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미국 월가엔 돈과 욕망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한다. 욕망이 탐욕으로 흐를 때마다 위기가 발생하곤 한다. 인간의 죽음에 비유되는 파산이 속출한다. 개인적인 좌절·아픔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도 증폭된다. 걸작 자서전·소설·논픽션·영화가 탄생하기 딱 좋은 조건이다. 실제 미 금융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이 『금융제국 월스트리트』에서 “월가가 미 경제뿐 아니라 걸작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그 위기와 걸작의 교집합을 살펴본다.


뜻밖의 일이다. 세계 최대 온라인서점인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고 16일 현재 두 권이 자웅을 겨루고 있다. 디즈니가 펴낸 그림책 『겨울왕국』과 금융기자인 마이클 루이스의 논픽션인 『플래시 보이스(Flash Boys)』다.

 애초 『겨울왕국』의 독무대였다. 애니메이션 인기를 등에 업고 나온 그림책의 대중성을 어떤 작품이 대적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올 3월이 저물 무렵 나온 『플래시 보이스』가 열흘 정도 만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후 두 책의 순위는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플래시 보이스』는 이른바 ‘초단타 매매(High Frequency Trading)꾼’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주식·채권·파생상품 등을 찰나에 사고판다. 월가 사람들이 말하는 ‘1000분의 1초 승부사’들이다. 이런 “은밀한 머니게임 세계의 이야기가 지극히 대중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 기현상”이라고 뉴욕타임스(NYT)는 평했다. 비결이 무엇일까.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금융위기는 경제적 고통만이 아니라 사회심리학적인 의문과 분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왜 우리가 금융회사 구제금융을 떠안아야 하는가’ ‘금융위기와 관련 없는 내가 왜 회사에서 쫓겨나야 할까’와 같은 분노가 섞인 의문이 미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얘기다. 루이스의 새 책이 호소하는 대목이다. 루이스는 책에서 초고속 트레이딩꾼들은 거대 투자은행 골드먼삭스 등에 의해 장악된 장기판의 말임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그들이 위기의 원흉임을 시사한다.

 『플래시 보이스』는 앞서 발표된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마진콜’(2011), ‘월스트리트 2’(2010) 등의 연장선에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월가 위기가 책이나 영화의 히트로 이어진 130년 전통의 맨 뒤 페이지이기도 하다.

 그 전통의 첫 장은 1884년 이른바 ‘그랜트 쇼크’였다. ‘남북전쟁의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 전 대통령이 아들을 통해 설립한 증권사 ‘그랜트&워드’가 파산하는 바람에 일어난 금융위기다. 영국 출신 투자전략가인 에드워드 챈슬러는 『금융투기의 역사』에서 “그랜트가 대통령 퇴임 이후 아들을 통해 출자한 증권사가 증권을 담보로 돈을 빌려 투기거래를 일으켰다”며 “끝내 증권사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월가의 증권사 파산 도미노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랜트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인 빚 15만 달러를 갚지 못해 파산했다. 미국 역사상 퇴임 이후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이유다. 그나마 그랜트는 빚을 갚기 위해 회고록을 쓰는 양심은 있었다. 인세를 받는 대신 분노에 찬 대중에게 위기가 왜 일어났는지를 솔직히 고백했다. 챈슬러는 “그가 숨지기 사흘 전에 탈고한 『그랜트 회고록』(1885)은 솔직함과 간결함이 어우러진 미국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걸작”이라며 “베스트셀러가 돼 그의 후손들이 부채에서 해방됐다”고 말했다.

 월가의 위기가 문학사에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은 『분노의 포도』(1939)다. NYT 기자 출신인 존 스타인벡의 작품이다. 대공황이 낳은 경제적 고통 때문에 오클라호마주 소작농 일가가 어떻게 수탈당하는지를 그린 소설이다. 발표 직후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미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소설이다.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온갖 금융규제로 월가 금융인들이 ‘회색인간’처럼 행동해야 했던 1950~70년대까진 눈에 띄는 걸작이 없었다.

 상황은 80년 이후 돌변했다. 규제완화 바람이 불었다. 욕망이 규제사슬을 끊고 분출했다. 기업이 머니게이머들의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정크본드(비우량 회사채)란 신종 병기로 자금을 끌어모아 기업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끝내 위기가 엄습했다. 87년 10월 주가대폭락(블랙먼데이), 대부조합(S&L) 사태, 91년 경기침체 등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89년 “월가를 배경으로 온갖 장르의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첫 단추는 톰 울프의 소설 『허영의 불꽃』(1987)이었다. 울프는 “월가에서 잘나가다 몰락하는 주인공을 통해 개인의 물욕과 권력욕뿐 아니라 인종·계층 갈등을 보여 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20세기 100대 영문소설로 선정됐다. 논픽션으론 브라이언 버로 등이 기업사냥의 실상을 폭로한 『문 앞의 야만인들』 등이 걸작 반열에 올랐다. 80년대 색다른 현상 하나는 바로 월가의 머니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월스트리트’(1987)다. 마이클 더글러스가 연기한 주인공 고든 게코의 입에서 80년대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탐욕은 좋은 것이다!”

 금융역사가인 고든은 위기 이후 대중이 『플래시 보이스』 등에 열광하는 것에 대해 “대중이 위기가 낳은 분노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해 기억하며 조금씩 해소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제의(祭儀·살풀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남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