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모택동 사후의 중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국민 들에 있어서는 6·25동란의 쓰라린 원한으로 인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중공당 주석 모택동이 9일 새벽 사망했다.
중공으로서는 주은래·주덕을 이은 그의 사망으로 지난 반세기동안 중원을 지배해오던 「장정」세대의 연안체제가 종막을 고한 셈이다.
당면해서 우리의 관심은 모택동 후의 중공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데 있다.
모택동 개인의 죽음이 과연 모사상과 문혁의 종막을 동반할 것인가. 그의 죽음은 과연 상해파의 쇠퇴와 실무파의 득세, 나아가서는 중소화해 까지도 촉진시킬 것인가. 그렇다면 미국의 「데탕트」정책과 세계적인 규모의 3극 구조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아직까지는 이와같은 질문에 대해 그 어떤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모택동 자신의 집념과는 달리 그의 사상적 상속자라 할 상해파가 앞으로의 중공 권좌를 배타적으로 독점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모택동은 공산주의에다 제왕권적인 중화사상, 그리고 「코뮌」적인 영속 혁명론을 절충한 일종의 과대 망상자였다.
그러나 1950년대에 있어 중공 당과 국정의 실권은 유소기·등소평 등 당내 근대화주의자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1960년대의 「문화혁명」이란 바로 그와 같은 실권을 만회하기 위한 모택동의 마지막 반격이자 유언장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뒤 10년에 걸쳐 무자비하게 추진되어온 문혁의 소용돌이는 결국 거대한 환멸을 안겨다 주었을 뿐이다. 당·국무원·군의 중추에는 여전히 노 간부와 주은래의 실무파 인맥이 도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엔 등소평마저 복권되어 모사후의 중공을 송두리째 상속 받을 뻔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모택동 직계인 상해파의 초조감과 좌절감은 극도에 달했으며, 그들의 필사적인 예방적 「쿠데타」가 바로 지난 연초의 등소평 숙청이었던 것이다. 등의 숙청과정에서 국무원의 주류인 주은래 인맥과 군부는 중립과 침묵을 지켰을 뿐 결코 박수를 보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많은 군중과 일반시민은 주은래를 추모하는 천안문 폭동을 통해 반「반주자파」감정, 즉 반 모 성향을 노골화시킨 바도 있다.
군중의 반「반주자파」감정은 곧 모택동의 전근대적 지배와 끊임없는 「혁명유희」에 대한 반발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 정치 판도에 대두하기 시작한 천안문형의 군중은 이미 지긋지긋한 「투쟁과 혁명」 보다는 안정과 윤택한 생활을 갈망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이후의 과도적인 집단 지도 체제를 「리드」하는 화국봉과 국무원의 중추세력인 주은래 인맥은 그와 같은 군중심리의 저류를 적시하는 상해파 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무조건 영합하는 경제 주의자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실용주의적인 중도파라고나 할까. 그러나 여하튼 화 체제는 주은래가 양성해놓은 실무파와 군의 「중립」내지는 도움을 받아 문혁파를 견제하면서 중공의 근대화를 추진해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외교 정책에 있어 화 체제는 당면의 단기전략인 「미국의 군사력 배치를 원용하는」전략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만은 상해파나 실무파가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임표 사건이 입증했듯이 군 내부에는 팽덕회·나서경 이래의 「반미 통일 전선파」와 유무기 주의자 계열이 의연히 잔존해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권력투쟁이 재연되어 혼란이 장기화될 경우, 여기에 「크램린」의 공작의 촉수가 미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나 한반도 안정을 위해서는 중소가 화해해도 곤란하고 정면충돌을 해도 곤란하다.
때문에 그러한 사태가 오지 않게 미·일·호·EEC는 화국봉 체제의 대소전략과 내부 권력투쟁을 예의 주시하면서 기민한 대응책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 하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